최고경영자(CEO)에 대한 평가는 회사의 흥망성쇠에 따라 달라진다. 자수성가형 기업가에서 한순간 과욕 넘친 CEO로 전락하기도 한다. 명예도 잃고 경영철학도 부정된다. 국가 경영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1990년대 말 경제 위기를 겪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가치는 폐기 대상에 올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한국식 사고 방식은 부정됐다. 유교 영향을 받은 조직 문화도 지탄 대상으로 부각됐다. 전대미문의 금융 위기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지 않은 결과로 해석됐다. 이른바 `아시아식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결과는 어떠했는가.
당시 우리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서구 자본주의에 화답했다. 외국인 눈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국가 경영은 곧 정상화됐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서도 한국식 기업 문화는 저력을 발휘했다. 강력한 오너 책임 경영은 위기를 타개하는 원동력이었다. `정실 자본주의`로 지탄받던 한국식 기업 문화는 위기 때 힘을 발휘했다. 아시아식 가치는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었다.
`청렴 대한민국`으로의 항해 역사가 시작됐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일명 김영란법)은 분명 한국 사회를 좀 더 투명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보다 법정의 구현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동안 적잖은 사람들이 `돈은 받았지만 대가성은 없었다`라는 판결을 통해 법망을 빠져나갔다. 국민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김영란법을 지지하는 이유다. 국민 정서에 부합한다. 우리 사회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선 부정·부패가 사라져야 마땅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처럼 국민 정서에 반하는 결정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온갖 논란에도 우리 사회가 이 법을 잘 가꿔 나가야 하는 이유다.
다만 새로운 정책은 항상 동전의 양면과 같다. 빛과 그림자를 동반한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생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특히 한국인 고유의 어울림 문화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단절사회와 불신사회가 그것이다.
실제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식사 약속을 취소하고 나 홀로 삶을 택하는 사람도 늘었다. 부담스런 약속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뜻하지 않게 `혼밥족`도 생겨났다. 시행 초기의 김영란법 태풍은 예상보다 강하다. 법 적용 대상자 400만명은 바짝 움츠렸다. 소나기는 피하자는 생각에서다. 당분간 `혼밥·혼술 문화`는 더욱 확산될 게 분명하다. 법 적용 대상자들은 모호한 상황을 회피하는 상수를 택했다. 캔커피를 받은 대학 교수가 1호 신고로 접수된 것은 시행 초기 해프닝일 수 있지만 앞으로 악용될 소지는 충분하다. 서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신사회로 흐르는 부작용이 그것이다.
언제부턴가 길거리에 음악이 사라졌다. 대형 마트와 커피 전문점도 조용하다. 연말 분위기를 북돋던 크리스마스 캐롤도 찾아볼 수 없다. 저작권법 단속이 강화된 이후의 변화상이다. 창작자의 저작권이 보호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법 만능주의가 된 사회는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도 마찬가지다. 법은 청렴 사회로 가는 고속도로 역할을 할 것이다. 다만 우리 고유의 문화 및 가치와의 충돌은 상당 기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특수성은 추후에라도 고려돼야 한다. 삭막한 사회는 법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
김원석 성장기업부 데스크 stone20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