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을 이끌 기술로 주목받는 `크리스토퍼 유전자가위`가 국내에서는 각종 규제로 제대로 된 연구조차 못한다. 국내 연구진은 세계 최초로 인간 유전자 맞춤 교정의 길을 열었지만 적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럽, 중국 등 후발주자에 추월당할 우려다. 맞춤형 의학을 구현할 핵심 기술에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지원이 요구된다.
31일 국회바이오경제포럼(의장 박인숙·오제세 의원)은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크리스토퍼 유전자가위 연구개발,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크리스토퍼 유전자가위는 생명체 DNA를 잘라 교정하거나 교체하는 기술이다. 사이언스와 MIT 테크놀로지 리뷰는 각각 `2015년 혁신기술`과 `세상을 바꿀 10대 기술`로 꼽았다. 관련 기술을 주도하는 연구자가 차기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적용 분야는 크게 세 군데다. 암이나 유전질환, 난치성 질환 환자에 적용해 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유전자를 수정·제거한다. 동식물에 적용할 경우 유전자를 편집해 질병 저항성 가축, 고부가가치 농작물을 생산한다. 인간 배아 유전자를 교정해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게 도울 수도 있다.
국내 기술은 세계적이다.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을 중심으로 국내 연구진은 2012년 세계 최초로 인간배양세포에 도입해 유전자 맞춤 교정 시대를 열었다. 1세대 크리스토퍼인 ZFN(Zinc Finger Nucleasws)부터 최신 기술로 평가받는 크리스토퍼-Cpf1까지 국내 연구진이 독자 개발했다.
그럼에도 최근 미국, 유럽, 중국 등에 기술을 추월당할 처지다. 생명윤리법 등 관련 규제가 연구 및 기술적용을 가로막는다. 관련 특허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투자받을 기회도 적다.
김진수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현 생명윤리법은 유전자가위를 환자 체내에 직접 전달해 치료하는 것을 금지한다”며 “OEDC 국가 중에서 체내 유전자치료를 법률로 규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적용 대상도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거나 생명 위협이 되는 질환에 대해서만 연구개발을 허가한다”며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지만 생명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를 가로막는다면 국민건강 증진은 물론 기술개발도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미국, 일본, 유럽 등 대부분 국가는 크리스토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연구를 전임상, 임상 과정에서 안전성, 유효성을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법률로써 연구 분야와 적용대상을 제한한다. 이러는 사이 미국과 중국은 이 기술을 적용해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항암 면역세포치료제를 암 환자에 투여하는 임상시험을 진행했거나 계획 중이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앞섰다고 평가했지만, 각종 규제로 중국 등에 추월당할 처지”라며 “정부 자원을 투입해 추가 연구도 필요하지만, 이미 연구 중이라는 이유로 팔짱만 끼고 있다면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유전자가위 기술을 적용한 농산품을 유전자변형농산물(GMO)로 규정한 것 역시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다. 외부 유전자를 넣는 GMO와 내부 유전자만 변이시키는 유전자가위는 다르다. GMO로 규정된 농산품을 해외로 수출하려면 안전성, 유효성 검증을 위해 막대한 금액이 소요된다.
김 단장은 “GMO는 외부 유전자를 넣지만, 크리스토퍼는 편집된 유전자를 넣을 수도 있지만, 내부 유전자만 변이를 일으켜 사실상 육종과 유사한 개념”이라며 “미국만 해도 관련 부처는 GMO로 규정하지 않은데다 10여종에 달하는 농산물까지 생산했지만, 우리나라는 GMO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정해권 산업부 바이오나노과장은 “유전자가위 기술을 사용하면 인간에게 유용한 농산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데 공감한다”며 “하지만 인간이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연구가 덜 된 상태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황의수 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유전자 치료제 적용 분야를 포괄적으로 확대하는 심의기구를 설치할 예정”이라며 “전문기구를 통해 논의된 내용이 축적되면 유전자가위에 대한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