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권자가 적정 가격에 판매한 특허품을 제3자에게 재판매·재가공해 유통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또 제품이 국내 판매용인지 해외 판매용인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이는 무형재산권인 특허가 유형물에 구현되면서 `특허권`과 `소유권`이라는 두 권리가 공존하면서 생기는 의문이다. 특허권자가 특허품을 만들어 팔면 구매자는 특허품 소유권을 갖지만 특허권자는 여전히 특허권을 보유한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특허소진이론`이다.
◇특허소진이론
특허소진이론이란 특허권자 허락 아래 판매한 특허품은 판매 이후 사용 및 재판매에 대해 특허침해주장을 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특허소진이론은 국가별 법률에 따라 적용범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각국 법률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최근 미국 연방항소법원(CAFC)이 심리한 렉스마크 대 임프레션 사건(렉스마크 판결)을 중심으로 특허소진 논의를 소개하겠다.
사건 배경은 이렇다. 렉스마크는 프린터 토너 카트리지를 미국 내외에서 판매하고 있었고 토너 카트리지는 특허권으로 보호받는 제품이다. 렉스마크는 해당 카트리지를 구매 후 재사용·재판매 제한이 없는 정가 판매용 제품과, 재사용·재판매를 금지하는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로 나눠 판매했다. 정가 판매용과 달리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는 토너를 다시 채워 사용할 수 없도록 이를 감지하는 마이크로칩을 설치했다.
하지만 여러 회사가 이미 사용된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의 마이크로칩을 교체한 뒤 토너를 다시 채워서 임프레션에 판매했고 임프레션은 이를 다시 미국 내에서 판매했다. 이에 렉스마크는 임프레션과 관련 업체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다.
토너 카트리지는 크게 네 그룹으로 나뉜다.
(i)미국 내에서 판매된 정가 판매용 카트리지
(ii)미국 내에서 판매된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
(iii)미국 외에서 판매된 정가 판매용 카트리지
(iv)미국 외에서 판매된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
그룹 (i)은 특허소진이론이 적용되는 전형적인 경우다. 렉스마크는 이에 대해 특허권 침해주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룹 (ii)~(iv)에는 특허침해주장을 했고 이는 CAFC 심리대상이 됐다.
따라서 CAFC는 (1)렉스마크가 미국 내에서 판매한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를 임프레션이 미국 내에서 재사용·재판매한 행위에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되는지 여부 (2)렉스마크가 미국 외에서 판매한 할인 및 정가 판매용 카트리지를 임프레션이 미국 내에서 재사용·재판매한 행위에 권리소진 이론이 적용되는지 여부를 검토했다.
◇제한요건이 붙은 국내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에 권리소진이론 적용 여부
첫 번째 쟁점에 대해 임프레션은 2008년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콴타 대 LG전자, 553 US 617) 법리를 고려할 때 1992년 CAFC 판결(말린크로트 대 메디파트, 976 F.2d 700) 법리는 유지될 수 없다며 렉스마크의 할인 판매용 카트리지에도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린크로트 판결에서 CAFC는 특허권자가 특허품 판매 이후 재사용·재판매 행위에 대해 독점금지법 등 다른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적법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판시했는데 이러한 법리 자체가 2008년 대법원의 콴타 판결에 비춰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8년 대법원에서 심리한 콴타 사건은 특허권자가 특허물품을 판매한 경우의 권리소진과는 다른 경우다. 특허기술을 이용해 특정 부품을 생산·판매를 허락하는 특허권 실시허락에 대한 사건이었다. 구체적으로 라이선스 기술로 생산한 부품을 제3자의 다른 부품과 결합해 사용·판매하는 것이 라이선스 대상이 되지 않는다(그런 경우까지 실시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는 제한을 두더라도 부품이 라이선스 기술에 의해 제조된 것이면 이를 제3자 부품과 결합해 사용·판매하는 행위가 특허침해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콴타 사건의 구체적인 사실 관계는 이렇다. 특허권자인 LG전자는 인텔에 자사 특허기술이 적용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칩셋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라이선스와 별도로 인텔이 생산한 마이크로프로세서 및 칩셋과 인텔 제품이 아닌 부품을 결합하는 형태의 제품에 해당 라이선스 계약이 적용되지 않으며 이런 사실을 인텔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사에 알려야 한다는 계약을 인텔과 체결했다. 아울러 계약서는 이런 계약내용 위반이 라이선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콴타는 LG전자 특허가 적용되는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칩셋을 델, HP 등 타사 컴퓨터 제조에 사용했고, LG전자는 콴타를 상대로 특허침해를 주장하는 소를 제기했다. 대법원은 상기 라이선스 외 별도 계약은 인텔이 고객에게 해당 라이선스 내용(비 인텔 부품과 결합하는 행위에는 라이선스 미부여)을 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 인텔 부품을 비 인텔 부품과 결합하기 위해 구매하는 고객에게 판매하는 행위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다. 또 이런 계약내용 위반이 라이선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계약서에서 명시하고 있으므로, 정당한 실시권자인 인텔로부터 특허품을 구매해 사용한 콴타 행위에는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돼 특허권 침해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렉스마크 사건으로 돌아가면 임프레션은 콴타 관련 대법원 판례가 특허품 판매 이후 재사용·재판매 제한을 특허권자가 허용하지 않음을 설시한 것으로, 판례 내용에 비춰 보면 말린크로트 판결은 유지될 수 없고 이번 사안에서 렉스마크가 특허품 판매 이후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권리소진이론에 따라 자사 행위는 침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CAFC는 대법원의 콴타 판례는 말린크로트 판결이나 이번 사건과 달리 실시권자인 인텔이 콴타에 특허품을 판매한 것으로 특허권자에 의한 판매가 아니고 특허권자가 명시적인 재사용 및 재판매에 제한을 둔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며 이번 사건 또는 말린크로트 사건과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렉스마크가 부여한 특허품 판매 이후 제한 사항은 유효하고 이런 제한 사항에 해당하는 행위에는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될 수 없다고 봤다. CAFC는 임프레션의 미국 내 할인용 카트리지 판매행위가 특허권 침해를 구성한다고 판시했다.
◇미국 밖에서 먼저 판매한 카트리지에 권리소진이론 적용 여부
두 번째 쟁점에 대해 임프레션은 2013년 대법원 판결(커트생 대 존윌리앤드선, 133 S.Ct. 1351)에 비춰 보면 2001년 CAFC 판결(재즈포토 대 미 국제무역위원회(ITC), 264 F. 3d 1094) 법리는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01년 CAFC는 재즈 포토 사건에서 특허권자가 특허품의 미국 외 판매만 허용한 경우 이는 해당 특허품의 미국 내 판매 허용과 구별되므로 미국 내 특허품 판매는 침해를 구성한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2013년 미국 대법원은 저작권 국제소진을 다룬 커트생 사건에서 미국 외에서 적법하게 판매된 저작물을 미국으로 수입해 판매하는 것이 저작권 침해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태국 출신 미국 유학생 커트생이 미국보다 태국에서 저가에 팔리는 존윌리앤드선 교과서를 태국에서 구입 후 미국으로 수입해 판매한 것이 문제가 됐다. 대법원은 커트생의 미국 내 판매행위는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돼 저작권 침해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저작권법 109(a)에 따르면 저작권법 아래 적법하게 제작된 저작물의 지역 범위를 미국 내로 한정하지 않는다.
상기 대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임프레션은 해외에서 구매한 렉스마크 카트리지에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되므로 특허권 침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CAFC는 상기 대법원 판례는 저작권법에 대한 것으로 특허법에 대한 재즈포토 및 이번 사건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저작권법이 저작권 적용범위를 미국 내로 한정하지 않는 명시 규정을 둔 것과 달리 특허법은 그러한 규정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CAFC는 임프레션이 해외에서 정가 판매된 토너 카트리지를 변형해 미국 내에서 재판매한 행위는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되지 않으며 특허권 침해를 구성한다고 판시했다.
◇“특허권자와 특허품 구매자 모두 렉스마크 판례 주목해야”
렉스마크 판례는 특허권자 및 특허품 구매자 모두가 눈여겨봐야 한다. 이번 판례는 특허권자가 특허품 판매 이후 재사용 및 재판매 행위를 명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고 이 경우 제한 행위에 대해서는 특허품 판매 이후에도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확히 했다. 따라서 미국 특허권자는 특허품을 판매할 때 사업 목적에 따라 특허품 판매 이후의 재사용·재판매를 명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제한은 제품 포장 및 라벨 등에 제한이 되는 사항을 명시하면 된다.
반면 이러한 제한을 하지 않으면 특허품 판매 이후 재사용·재판매를 허락하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권리소진이론이 적용돼 이후 행위에 특허침해를 물을 수 없다. 반면 특허품 구매자는 특허품 구매 시 구매 이후 행위에 특별한 제한사항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특허품 구매 이후 행위에 제한이 있으면 특허품 구매자는 제한 사항을 꼼꼼히 살펴보고 제한 내용이 독점금지법 등 타법에 위배되는지 또는 특허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렉스마크 판례는 특허권 소진이론 범위가 미국 내외로 나뉘어 판단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허권자 및 특허품 구매자 모두 특허품의 구매 계약 시 지역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난 3월 임프레션은 CAFC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렉스마크 판결이 권리소진이론에 중요한 잣대를 제시하는 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상세 내용은 IP노믹스 홈페이지(www.ipnomics.co.kr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선희 수그루마이온 미국변호사 sxlee@sughru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