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 경험 혁신
간단한 외래 수술이 입원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계 최고 병원이라고 자부하던 그곳은 끔찍한 경험이 됐다.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제임스 메를리노 교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겪은 체험을 살펴보기로 한다. 호출 벨을 눌러도 간호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주문과 다른 음식이 나왔고, 조금이라도 걷고 싶을 때면 물리치료사를 찾을 수 없었다. 주치의는 회진을 돌지 않았다.
메를리노 교수는 자신이 받은 교육을 되짚어 보았다.
“객관적이어야 해. 사려 깊지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 환자 가족이 내 팔이라도 잡을 때면 손을 놓을 때까지 말을 안 해야겠어.”
환자 중심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자와 면담 방법은 며칠 동안만 배웠다. 공감이나 휴머니즘은 관심이 가장 적은 주제였다. 환자를 사람으로 보기보다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대했다.
고객 중심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하지만 고객을 구매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기란 어렵다. 환자를 질병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기가 어렵던 것처럼.
뱅크오브아메리카(BOA)라는 기업이 있다. 1955년에 은행 최초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같은 해에는 수표에 사용하는 인식숫자체계를 만든다. 이는 금융산업의 표준이 된다. 크레디트카드를 처음 만든 것도 BOA이다. 1958년 당시에는 뱅크아메리카드(BankAmericard)라고 했다. 지금은 `VISA카드`라고 부른다. 현금자동인출기(ATM)를 처음 도입한 것도 이들이다. 자산으로 미국 두 번째, 5000만명 넘는 고객과 5000여개의 지점, 1만6000개 넘는 ATM을 운영하고 있다.
설립자 아마데오 자니니가 없었다면 그 이상 의미는 없다. 자니니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아들이다. 6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가난이 덮쳤다. 이탈리아 이민자 거리에서 가게를 열었다. 30세에 벌써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어느 날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대출은행 이사회에서 이민자와 소상점에 소매 대출을 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이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1904년에 익숙한 이민자 거리에서 뱅크오브이탈리아(Bank of Italy)를 열었다. 작은 돈을 모아 쪼개어 빌려줬다.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던 1906년 어느 수요일,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 주 토요일, 다른 은행들이 6개월 동안 업무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니니는 바로 다음날인 일요일에 모든 것이 부서진 거리에서 나무술통 두 개를 놓고 대출을 시작했다. 은행이란 록펠러, 카네기, 밴더빌트 같은 재벌을 위한 것이던 시대에 사람을 바라보았다.
메를리노 교수는 저서 `환자의 경험이 혁신이다(Service Fanatics)`에서 서비스의 본질을 말한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환자제일주의`를 모토로 삼는다. 환자경험실을 만들었다. 환자경험최고관리자라는 임원을 둔다. 리더십 라운드를 열고 성공사례 `훔쳐오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환자 중심으로 문화를 재정렬했다. 변화에 불을 지피기 위해 조직의 유산과 역사까지 동원했다. 환자 가운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지 않는가를 고민했다. 전설 디자이너 다이앤 폰 퓌르스텐베르크를 초빙, 새 환자 가운을 만들었다.
메를리노 교수에게 의료의 본질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메를리노 교수가 경험최고관리자에 응모했을 때 병원장인 델로스 코스그로브는 환자 경험을 어떻게 개선할 거냐고 묻는다. 그는 확실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고 답한다. 그리고 당신은 알고 있느냐 되묻는다. 코스그로브의 대답도 같았다. 그래서 함께 방안을 찾는다.
이제 우리 자신의 생각과 기존의 방식을 한번 돌아보자. 나는 오늘 고객을 `사람 그 자체`로 보고 있는가.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정체성이 있고 취미와 열정 및 성공과 실패가 있는, 제각각 삶의 기억과 스토리를 품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