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바람과 파도가 전부였던 가파도(加波島)가 `탄소프리 아일랜드`로 탈바꿈한다. 126세대 섬 주민이 사용하는 전력은 디젤발전기가 아닌 풍력발전기와 가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기에서 얻는다. 신재생에너지로 섬에서 사용하는 전력을 모두 생산할 능력은 이미 갖췄지만, 아직 전력을 저장해뒀다가 필요할 때 뽑아쓰는 저장장치가 없어 디젤발전기를 일부 사용하고 있다. 오는 6월 에너지저장장치(ESS)까지 설치되면 우리나라 1호 탄소 독립 섬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로 가는 뱃길 왼쪽에 떠있는 작고 낮은 섬 가파도. 마라도 인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섬 가파도가 화석연료로 만든 전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탄소프리 섬으로 더 유명해졌다.
지난 19일 제주 모슬포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20여분 만에 가파도에 내렸다. 바다위 깔린 녹색의 양탄자처럼 평화로운 실루엣이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작은 섬의 전력을 책임지고 있는 두기의 풍력발전기다. 거센 바람을 받아 힘차게 돌고 있는 이 풍력발전기가 섬 전체 주민의 발전기인 셈이다. 섬 최고 해발이 20m에 불과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평평한 접시에 바람개비가 얹힌 듯한 형상이다. 언덕 하나 없이 바다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어 파도가 조금만 거세도 섬이 물에 잠길 것만 같다.
배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거센 바람이다. `파도가 더해진다`는 이름 그대로 바람이 세차고 파도가 거칠다는 것을 실감하며 선착장 옆 대합실에 들어섰다. 여기서 만난 김동옥 가파리 이장의 첫 마디는 “거센 바람에 놀랐겠지만, 가파도 날씨는 항상 이렇다”고 했다. 3월까지 바람이 거세고 4월을 넘어서면 마치 지중해 같은 따뜻한 날씨가 이어진다고 말했다.
가파도는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자립을 위해 제주도가 추진하는 `카본프리 아일랜드 제주2030` 사업 시범지다. 탄소제로 섬을 꿈꾸는 제주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력, 남부발전, 삼성SDI, 효성 등 기업이 참여해 마이크로그리드와 ESS 등 최신 기술을 이곳에 심는다.
과거 가파도 전력을 책임지던 디젤발전기는 이제 풍력·태양광 발전기, ESS에 자리를 내줬다. 250㎾ 규모 2기 풍력발전기는 남부발전에서 지었다. 섬 하루 전력소비량이 평균 3000㎾h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두배가량 전력공급 능력을 가졌다. 혹시 모를 풍력발전기 고장에 대비한 것이다.
섬 내 37가구엔 3㎾ 태양광발전 설비가 설치됐다. 태양광 발전설비를 갖춘 가구는 자체 소비량 80%를 직접 생산하기 때문에 전력수요가 더 줄어든다. 섬 주민이 공용으로 쓰는 승용차 4대도 모두 전기차로 바꿨다. 나머지 차량 6대도 전기차 교체를 검토하고 있지만 전기트럭 등 필요한 모델이 없어 늦어지고 있다. 섬 경관을 망치던 전신주 130여개도 모두 땅속으로 들어갔다.
신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이 충분하다 못해 남는 상황인데도 완전한 카본프리 아일랜드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부족한 전력저장 용량 때문이다. 지금 쓰는 ESS 용량은 1850㎾h로 하루 전력소비량 3000㎾h에 모자란다. 오는 6월에 2000㎾h 규모 ESS를 확충하면 총 3850㎾h로 늘어난다. ESS 용량이 늘어나면 신재생에너지 생산 전력을 모두 저장해 섬 주민들이 청정에너지만 사용할 수 있다. 이후 디젤발전기는 완전히 가동을 멈추고 퇴역한다.
사업 진행으로 섬 주민에게 경제적 혜택도 돌아갔다. 김 이장에 따르면 태양광발전 설비를 갖춘 가구는 전기요금이 이전 20% 수준으로 떨어졌다. 월 5만원 내던 요금이 7000~8000원으로 낮아졌다. 무엇보다 전선 지중화 사업으로 전신주가 사라지면서 섬 경관이 수려하게 바뀌었다. 잦은 태풍으로 겪었던 정전 걱정도 덜어줬다.
김 이장은 “카본프리 아일랜드 사업으로 섬 주민 삶의 질이 한 단계 높아졌다”며 “사업 시작 전에는 우려도 많았지만, 설비 준공 후 주민이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면서 3년이 넘도록 만족스럽다는 말만 나온다”고 말했다.
신재생에너지와 마이크로그리드·ESS 기술을 접목해 주택과 학교, 담수화 설비 등 모든 전력 문제를 해결한 진정한 탄소 독립섬 가파도의 모습을 올 여름이면 만날 수 있다.
가파도(제주)=
함봉균 에너지/환경 전문기자 hbkon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