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가 과학기술·정보통신기술(ICT)·벤처 분야 입법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가상현실(VR), 핀테크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ICT 관련 선제적 입법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가운데 과학기술·ICT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이면서 의회에는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경제위기 돌파 카드로 `ICT 융합` 신메뉴 개발을 목청껏 외치지만 주방에는 `셰프`가 없다.
17일 여야 20대 총선에 확정된 공천 후보자를 분석한 결과 과학기술·중소벤처·ICT계를 대표할 인물은 소수에 불과하다. 여야 모두 우리나라가 당면한 경제·사회 문제를 풀기 위해 ICT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 양상이다.
지역구 확정 후보자를 보면 업계를 대표할 후보는 10명 안팎으로 압축된다. 아직 비례대표 후보가 남아 있지만 19대보다 의석수가 쪼그라들었고, 이공계 출신 가산점 20% 제도도 사라졌다. 당선 안정권에 들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 지역구 후보가 국회에 진출하고 비례대표 후보 모두 당선 안정권에 든다 해도 20대 국회의원 의석수 5%에도 못 미칠 전망이다.
19대에 비해 ICT 출신 후보자 공천이 씨가 말랐다. 현역 의원도 줄줄이 탈락했다.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대구 북구을)과 권은희 의원(대구 북구갑)이 대표적이다.
서 의원은 기계연구원장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회 과학기술위원회에서 활동했고, 교육과학기술정책 입안을 담당해 왔다. 권 의원은 KT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보호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다양한 ICT 입법을 추진했다.
ICT 전문가로 주목받은 윤창번 전 미래수석(서울 강남)과 황영헌(대구 북구을) 전 대구경북창조경제정책연구소 대표도 고배를 들이켰다.
한국인터넷진흥원장을 지낸 김희정 전 장관(부산 연제구)과 한글과컴퓨터 대표 출신 전하진 의원(분당을)이 공천을 받아 재선에 도전한다. 사이버 보안 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주대준 전 한국과학기술원 부총장(광명을)이 공천 티켓을 받아 국회 입성을 노리는 정도다.
과학기술·ICT 인사는 오히려 야당 쪽에 더 많이 포진됐다. 게임업체 웹젠의 김병관 의장,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유영민 전 포스코경영연구소 사장 등이 대표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출마하는 지역구는 `거물급` 여당 후보와 붙어야 하는 곳이어서 쉽지 않은 승부가 예상된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ICT산업 대변자 역할보다는 정치인으로서 더 부각되고 있다.
이부섭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정부 예산 30% 이상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가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고 있다”면서 “여야를 떠나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선 과기·ICT 정책을 주도할 전문가의 국회 진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현희 청와대/정책 전문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