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무척 좋아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커피에 푹 빠지게 되었다.
십 수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에 내려가서 살면서 직접 커피를 볶아서 마시기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커피를 사 먹을 수 있는 도시와는 달리 그 당시 제주도에는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이 없었다. 시간은 많고 돈도 아낄 겸 손으로 흔들어서 커피를 볶는 조그만 수망을 사서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서 커피를 볶기 시작한 것이 커피 여정의 첫 출발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커피는 어느새 내 인생의 깊숙한 곳에 들어왔다. 제주에 머물면서 몇 년간 카페를 운영했는데 그때 온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아직도 우리나라에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2013년에는 트럭을 장만해서 노란색으로 옷을 입히고 ‘풍만이’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그 안에 산지별 생두, 직화 통돌이 로스터, 핸드드립 도구들을 챙겨 커피여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니 나는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커피’를 나누는 것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인생의 커피를 만난 적이 있으리라. 아무런 생각 없이 마시던 커피였지만 어느 날 맛 본 한 잔의 커피, 그 커피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맛있는 커피였다는 기억, 그리고 그 커피를 마시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추억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는 ‘인생의 커피’인 것이다.
그것은 군대에서 보초를 서고 나서 맛본 자판기 커피일 수도 있고, 첫사랑과 함께 마셨던 비엔나 커피일 수도 있다. 또는 바로 오늘 어느 카페에서 마시게 되는 한 잔의 커피가 바로 당신에게 인생의 커피가 될 수도 있다.
나 또한 몇 번 ‘인생의 커피’를 만난 적이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에서 찾아간 바에서 주인장이 내려준 과테말라 안티구아, 커피가 재미없어져서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만난 에티오피아 하라, 힘들 때마다 언제나 믿음직스런 친구처럼 나를 위로해주는 케냐, 그리고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설렘을 주는 에티오피아 로미타샤…
인생의 커피를 만나는 순간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과테말라 커피는 특별하다.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있었을 때, 밤 늦게 찾아간 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었을 때 생각나는 것은 그저 향기로운 커피 한 모금이었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커피 메뉴가 있었고, 그 날도 그 술집의 주인장은 직접 핸드밀로 커피를 갈아서 커다란 머그잔 가득 커피를 내려주었다. 그 커피가 과테말라 안티구아였다. 그 한 잔의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나니 지쳐 있었던 정신이 다시 되돌아 온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의욕도 없이 바닥까지 쳐져 있었던 마음에 조그만 촛불이 켜진 느낌이었다. 커피 한 잔의 힘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위치한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는 지금도 활발하게 화산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화산지형의 열대 고지대, 기공질이 많은 부석과 높은 일교차는 커피 재배의 최적의 조건이다. 과테말라 생두는 중남미의 다른 커피들과는 달리 짙은 녹색을 띠고 있으며 단단하고 묵직하다. 보통 중남미 커피는 로스팅하기가 그리 까다롭지는 않지만 과테말라의 묵직한 생두는 로스팅을 할 때마다 그 맛을 내기 위해 진땀을 흘리게 된다. 로스팅하기가 워낙 까다롭고 제대로 맛이 나지 않아서 한동안은 과테말라 커피 로스팅을 포기한 적도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제대로 볶아진 과테말라를 진하게 내리면 다른 커피에서 찾기 힘든 깊고 풍부한 맛과 다크 초콜릿 같은 쌉싸름한 맛, 불에 탄 듯한 스모키한 맛을 내준다. 거기에 은은하게 퍼지는 살구와 자두, 감귤같은 신맛 또한 과테말라 커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과테말라 커피를 인생의 커피로 뽑는 커피 애호가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올해로 커피트럭 ‘풍만이’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 지 4년째가 된다. 풍만이 안에는 대 여섯 가지의 생두를 준비해서 다니는데 그 중에서 과테말라는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준비를 해둔다. 누군가 나처럼 힘들고 지쳐있을 때 내가 내려준 과테말라 커피 한 잔에 새롭게 힘을 얻기를 바라면서 과테말라를 로스팅하고 정성 들여 내린다. 나의 바람은 커피 여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커피’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커피트럭에서 맛 본 한 잔의 커피가 인생의 커피로 기억된다면 내 커피 여행 또한 꽤 큰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니까.
이담 login@naver.com 커피트럭 여행자. 서울에서 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제주로 이주해서 10년 동안 산 경험으로 ‘제주버킷리스트 67’을 썼다. 제주 산천단 바람카페를 열어서 운영하다가 2013년에 노란색 커피트럭 ‘풍만이’이와 함께 4년째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커피’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