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산업이 3가지 이슈에 직면했다. 발전·송배전·소비 과정상 손실 최소화다. 가정, 공장 등 수요부문에서 전체 손실의 90%가 발생한다. 신재생발전비율이 높아지면서 계통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도 과제다. 데이터가 이 같은 숙제를 풀어줄 핵심 수단으로 떠올랐다. ICT 융합으로 다양한 데이터를 얻고 분석해 최적의 운전 조건을 유지한다. 더 이상 굴뚝 산업이란 수식어가 무색하다. 지난달 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력 콘퍼런스 파워젠에서도 이런 트렌드는 두드러졌다. 글로벌 공룡 전력기업은 ICT를 접목한 설비 개발, 데이터 분석 능력에 발전업계 미래가 달렸다고 봤다.
◇ICT로 설비 투자 없이도 발전량 ‘업(UP)’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참가한 두산중공업 부스에 들어서자 스키 고글 같은 선글라스를 낀 관람객 모습에 한눈에 들어왔다. “전력 콘퍼런스에 웬 선글라스일까” 의아한 생각에 가까이 가 살펴보니 곧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안경을 쓰고 실제 발전소 내부를 가상으로 체험하는 관람객은 얼굴에 연신 웃음을 띄며 신기해했다. 페이스북이 인수한 오큘러스 가상현실(VR)기술을 활용한 서비스다. VR는 단순히 관람객 흥미를 끌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산중공업은 앞으로 엔지니어 교육이나 고객사 방문 때도 VR를 활용할 계획이다.
두산중공업은 기존 전력 설비 공급 중심 사업구조에 ICT를 녹이고 있다. 설비 사용, 관리 효율성을 높여 고객사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은 “ICT와 발전플랜트 융합은 미래 성장을 담보할 새로운 도전 과제”라고 강조했다.
VR는 단편적 한 예에 불과하다. 원격관리시스템(RMS)은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회를 기점으로 마케팅에 더욱 속도를 낸다. 박 부회장은 “RMS로 발전서비스 시장 공략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했을 정도다.
RMS는 발전소 원격관리 솔루션이다. 발전소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사전 예방이다. 특성상 고장 이후에 대처하면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RMS는 발전소 운영 프로세스를 중앙에서 원격으로 실시간 관리하는 모니터링 시스템이다. 발전소 운영에 있어 시공간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든 예방(검진)과 처방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보일러, 터빈, 발전기 등 주기기를 포함해 수천㎞ 전선 케이블과 전동모터, 밸브 등 발전소 설비를 사람이 직접 관리했다면 이제는 센서가 매순간 이상을 점검하고 데이터를 분석한다. 사고 가능성을 항상 가장 낮게 유지하기 때문에 고장률은 그만큼 떨어진다. 이는 곧 발전소 경제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발전소가 이상작동으로 정지된 뒤 수리를 거쳐 재운전까지 10일 정도가 걸렸다고 하면 RMS 도입 후 이상 징후를 먼저 포착해 원인을 분석하면 정지 시간을 2~3일로 줄일 수 있다. 500㎿급 발전소가 24시간 동안 100% 돌아간다고 가정하면 하루 14억원어치 전력을 생산한다. 정지 기간 7일을 줄이면 100억원을 더 벌 수 있는 셈이다.
두산중공업은 RMS전담팀도 출범시켰다. 발전소 설계, 관리, 운영 등 전문가로 구성해 데이터 분석 능력을 높였다. 한 달에 2회가량 터빈 진동, 온도 상승 등 이상 징후를 포착해 고객사에 알렸다. 발전소 두 곳에 RMS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올해 내 세 곳에 RMS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당진 화력발전소 5호기에 RMS를 구축하고 처음으로 화력발전소 유지 보수에 나선다. 발전소 운영이 미숙한 민자발전이나 해외 개발도상국에서 RMS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성장성도 밝게 내다봤다.
손우형 두산중공업 소프트웨어센터 상무는 “제조경쟁력은 기존 기계공학 지식과 더불어 유체역학, 열역학 등을 알고리즘과 소프트웨어로 반영하는 역량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며 “제너럴일렉트릭(GE), 지멘스 등 선진기업과 경쟁하려면 이 역량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GE는 파워젠 개막과 동시에 대형 계약을 발표했다. 미국 전력업체 다이너지(Dynegy)에 ‘어드밴스드 가스 패스(AGP)’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AGP는 발전소, 송배전 시설 등 곳곳에 부착한 센서가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데이터를 수집·해석하는 사물인터넷(IoT·미국 등에선 산업인터넷이라 부른다)기반 솔루션이다. GE가 핵심 사업으로 키우는 IoT부문 주력 제품으로 발전분야 비용절감 효과를 인정받았다. 캐나다 에너지 회사 트랜스캐나다가 운영하는 뉴욕 레이븐스우드발전소는 AGP를 도입해 발전량을 5%나 늘렸다. 센서를 통해 가스 흐름, 온도, 압력 등 가스 터빈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를 축적하고 발전소 운영에 활용했다. 항상 최상의 운전 조건을 유지하자 설비 투자 없이도 발전량이 크게 늘었다. 늘어난 전력량은 일년간 뉴욕시 1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아랍에미레이트 알루미늄 제련소 듀발도 2013년 4월 AGP를 도입했다. 연료 소비가 1.5%나 줄었고 발전소 보수 간격도 3만2000시간까지 늘었다.
전시회에 선보인 ‘윈드 파워업’ 솔루션은 풍력발전기에 적용한 대표 IoT 기술이다. 풍력단지 터빈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매 순간 수집하고 분석해 터빈을 미세 조정해 발전량을 늘린다. 독일 전력회사 이온(E.ON)은 469대 풍력 터빈에 ‘윈드 파워업 솔루션’을 적용한 결과, 발전량을 4.1% 늘릴 수 있었다. 풍력 터빈을 19대 추가 설치하는 효과다.
슈나이더일렉트릭은 이번 행사에 발전산업 운영 무결성 및 사이버 보안을 강화하는 ‘폭스보로 에보(Foxboro Evo)’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였다. 설치 공간을 줄일 수 있고 범용 소프트웨어로 구성돼 구축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최근 엑시다(Exida)로부터 두 건의 ISA시큐어 인증을 획득해 신뢰성도 확보했다.
이연주 슈나이더일렉트릭 본부장은 “IoT 기술을 이용해 전력산업 에너지 효율을 30%까지 향상시키고 유럽연합(EU) 기준으로 연간 70억유로에 해당하는 에너지 손실비용을 관리할 수 있다”며 “ICT와 융합이 가속화될수록 전력 보안솔루션 시장도 매년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이 바라보는 전력 시장 미래는
‘파워젠 2015’에서 열린 콘퍼런스는 미래 기후변화, 저유가라는 새로운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전력산업 미래를 점검하는 시간으로 기획됐다. 업계는 효율성 향상, LNG·신재생발전 비중 확대를 주요 키워드로 제시했다.
스티브 버버리치 캘리포니아ISO CEO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일부 지역에서 전력 공급과잉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며 “전력 저장, 발전소 보수 등 발전소 원가구조를 낮출 수 있는 효율성 향상 관련 투자가 줄을 잇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마스트란젤로 GE파워 CEO는 “알스톰 인수 이후 사업 범위가 크게 늘었다”며 “원유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서 불확실성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LNG가 가장 경쟁력 있는 연료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고객은 경쟁력이 있으면서도 가격 예측 가능한 연료를 선호하는데 LNG가 이에 부합한다는 설명이다.
스튜어트 험필 캘리포니아에디슨 부사장은 “태양광, 수력, 천연가스, 지열 등 에너지원 투자를 늘리고 있다”며 “기후변화 이슈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은 발전원 확보가 발전기업 경쟁력을 좌우하고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도 급격한 성장을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티븐 에드워드 블랙앤비치 회장은 “세계적인 물 부족 이슈에 따라 발전분야도 물 사용량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선진국에선 강력한 환경규제에 따라 석탄화력발전 비중이 점차 줄고 그 자리를 천연가스가 채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스베이거스(미국)=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