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은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 ‘소비의 사회’ 저자로 친숙한 장 보드리야르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기호를 먹고사는 현대사회를 분석한다.
장 보드리야르에게 ‘시뮬라크르(Simulacre)’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때로는 실재보다 더 생생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이것을 ‘파생실재’라고 불렀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시뮬라크르가 작동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다.
시뮬라시옹을 이해하도록 돕는 이야기가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른바 ‘명품백’으로 불리는 유명 브랜드 가방에서 브랜드를 뗀 사진을 게재하자 ‘저걸 어떻게 매고 다니냐’ ‘싸구려 같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다시 브랜드가 붙어 있는 원래 사진을 게재하자 ‘역시 명품은 다르다’ ‘꼭 사고 싶다’는 댓글로 도배가 됐다.
이를 두고 ‘한국 여성은 문제’라는 식의 성차별적 비판이 이어졌지만 이는 시뮬라시옹이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선 자동차 로고 바꿔달기가 유행하고 있다. 해외자본에 넘어간 국산차 브랜드를 떼고 해외브랜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국내 브랜드를 달았을 때보다 해외브랜드를 달았을 때 판매량이 더 늘었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한 예를 들었지만 시뮬라시옹은 이보다 훨씬 미세하고 광범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때도 많다. 우리는 가상실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은유는 영화 ‘매트릭스’에 차용되면서 유명세를 떨쳤다.
요즘 통신사를 중심으로 한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업계는 가상현실(VR) 기술을 연구하느라 바쁘다.
이 기술이 5세대(G) 통신 시대에 가장 대중적인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이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지금 기술로는 구현이 어렵다.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대용량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5G 시대에는 이 ‘만들어진 현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된다.
최근 한 이동통신사가 주최한 가상현실 토론회에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가상현실이 일상이 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두 기술이 널리 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만들어진 현실 속에 빠져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질까, 아니면 ‘이것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즐기기 때문에 오히려 이 같은 구분이 쉬워질까. 그도 아니면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까.
장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한다면 ‘어쩌면 가상현실 기술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가상현실 세계임을 은폐하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