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타인에게 만날 장소를 설명할 때 기준점이 있다. 기준점은 찾기 쉽고 누구나 잘 아는 장소여야 한다. 외진 곳에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기준점은 좋은 기준점이 아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하철역은 좋은 기준점이다. 약속장소나 회사 위치를 설명할 때 지하철역 출입구가 기준이 되곤 한다. 보통 몇 번 출구로 나와서 얼마 정도 걸어오면 된다고 말한다.
지하철역 출입구번호는 아무렇게나 붙이는 게 아니다. 약속을 정해놨다. 지하철 출입구번호를 매기는 데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상행방향 우측 원칙과 시계방향 원칙이다. 상행열차가 지나는 우측 방향에 1번 출구가 있고 시계방향으로 뒷번호가 매겨진다. 이런 원칙이 있는 것은 출구와 외부연결을 규칙화해 이용객 불편함을 최소화하자는 취지 때문이다. 만약 이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고 시스템은 뒤죽박죽이 된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예측 가능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정책이 시시때때로 바뀌면 국민은 혼란스럽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뒤집어지면 정부는 신뢰를 잃는다. 장기적 안목에서 신중하고 계획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잦은 정책변경으로 신뢰도가 떨어지면 기업은 투자를 기피하고 우회적 방법으로 혜택을 얻으려 해 부정부패가 자리 잡는다.
1년 전 초저금리 대출 상품을 내놓고 대출을 장려하던 정부가 대출심사 강화 정책을 내놔 시장이 혼란에 휩싸였다. 최경환 경제팀은 지난해 7월 출범하면서 주택 거래 등 부동산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LTV와 DTI 등 대출규제 완화책을 내놨다. 가계부채 심화 우려가 제기됐지만 정부는 대출이 늘어 내수 활성화가 이뤄지면 장기적으로 가계부채까지도 나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1년 만에 정부는 대출억제 정책을 내놨다. 만기 일시상환·거치식 형태이던 주택담보대출을 내년부터 원금과 이자를 바로 갚는 분할상환·비거치식 대출로 전환하고 대출심사방식도 담보 위주에서 대출자 상환능력 위주로 바꾸기로 했다.
정부는 가계부채가 1100조원에 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오락가락하는 정책은 시장에 혼란을 준다. 정부를 믿고 대출을 받았던 국민은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정책변경에 불안감에 휩싸인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8월 14일 임시 공휴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불과 10일을 남겨놓고 국민 사기 진작과 내수 활성화를 위해 임시 공휴일로 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하루 동안 민자 도로를 포함한 전국 모든 고속도로 통행료도 면제한다.
노는 건 좋지만 준비된 것 없이 갑자기 정해진 임시공휴일 때문에 국민과 기업은 혼란스럽다. 금융권과 주식시장·일부 대기업 등도 유급휴일 동참을 약속했지만 문제는 쉽게 휴업을 결정할 수 없는 대부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다. 쉴 수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6일 박근혜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했다. 임기 후반기를 맞는 현시점에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필두로 공공·교육·금융 부문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담화문에 특별한 내용은 없고 그동안 얘기해온 것의 재탕이라는 지적이 많다. 국민과 소통하는 예측 가능한 정책이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고 정책 성과를 높이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권상희 정책팀 부장 sh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