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재료 생산업체 A사
“전자재료 분야는 사업 특성상 고객의 신제품이나 기능 향상 제품 요구에 즉시 대응해야 한다. 공급 주기가 상대적으로 짧다. 하지만 신규 유해화학물질을 허가 받기 위한 장외영향평가서 작성에만 2~3개월, 검토에 1~2개월 등 4~5개월 일정이 소요된다. 특히 새로운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해 신제품을 제조하려면 해당 설비뿐만 아니라 같은 사업장 혹은 같은 생산동에 있는 별개 설비나 공정까지도 포함해 평가를 시행해야 한다. 규제에 대응하다 사업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
#중소 화학소재 업체 B사
“화학물질안전원에서 기업 자체적으로 작성한 서류보다 컨설팅 업체 등 전문기관에서 작성한 서류를 더 선호한다. 전문기관에 요청 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건당 2000만원이 넘는데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는 비용 부담이 매우 크다. 서류 검토·판정기간도 너무 길다. 법에서 정한 서류심사기간은 30일인데 실제로는 두 배 이상 소요된다.”
#정밀화학 업체 C사
“유해화학물질을 다루는 현장 직원은 의무적으로 16시간 정기 안전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하지만 현장방문 교육은 수강자가 100명 이상이 돼야 개설 가능한데, 3교대 근무 중인 상황에서 한 번에 수강자를 100명 이상으로 구성할 수 없다. 마땅한 교육 장소도 없다. 사업장별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현장방문 교육 인원제한 등을 없애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와 구미 불산 유출 사건으로 촉발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을 시행한 지 6개월이 흘렀다. 정부는 관련 산업계와 수십 차례에 걸친 의견 수렴으로 화학법령을 제개정했다. 시행 반년 만에 조기 정착에 실패하고 있다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현장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산업계 원성이 높다.
아직 시행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관련 법안을 평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분석도 있지만 관련 업계는 법 시행과 동시에 사업 추진에 급제동이 걸려 편법을 쓰려고 하는 등 오히려 역효과가 많다는 주장이다. 기존 유독물 관리법, 산안법 등 규제에 더 큰 올가미를 씌워 놓은 형국이라는 주장이다.
법령 시행 이후 현재까지 장외영향평가를 통과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화관법상 신규 유해화학물질이 들어가면 관련 설비뿐 아니라 같은 건물에 있는 사업장 모든 설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존 등록 물질에는 내년까지 유예기간을 줬다.
업체 한 대표는 “국내 정밀화학업계에서 지난 반년간 신규 물질을 쓰지 않았거나 증설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법을 어기거나 눈치만 보며 미루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중소기업은 도산 위기에 놓였다. 중간체 물질을 새로 등록하고, 시설 허가 받는 데 전체 직원이 매달려 작업하고 있다. 화평법, 화관법뿐 아니라 산안법, 가스 안전법, 유독물 관리법 등 각종 규제에 대응하느라 사업은 뒷전이다. 또 다른 업체는 위탁 생산하고 있는 터라 협력사와 함께 관리 기준을 맞추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사업 추진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제품 공급 주기가 짧은 정밀화학과 제약 분야 등은 정유화학과 같은 업계와 비교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 일부 물질은 독성 검사를 하기 위해서 관련 설비를 갖춘 일본, 유럽 등에서 진행해야 한다.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새로운 물질을 기존 물질명으로 바꿔서 등록하는 편법까지 동원한다.
유해 화학물질을 다루는 직원들의 개인보호장구 규정도 현장 상황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다. 메탄올 85% 이상이면 호흡보호구를 전면형 송기마스크로 착용하게 돼 있지만 오히려 에어호스가 작업 활동에 방해되고, 여름철에는 습기로 인해 마스크 전면이 안 보인다. 물질을 취급하는 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인증된 안전보호구 대부분이 수입 제품이며, 납기도 전면형 방독마스크는 제품 수령까지 3개월 이상 소요되는 실정”이라며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해 수정 보완하고 국산제품 인증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달 우선 화평법 시행규칙부터 일부 개정한다. 개정안은 제출서류 작성 간소화·통합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화관법 역시 법령 개정 수순을 밟을 예정이지만 아직까진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법을 만들고 난 뒤 단속만 강화하려 든다”며 “정부 취지에는 산업계도 공감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준비 사항을 정확하게 점검해 같이 호흡을 맞춰나갈 수 있도록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용어 설명
-화평법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의 줄임말로 신규화학물질 또는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를 의무화하는 법령이다.
-화관법은 ‘화학물질관리법’의 줄임말로 화학물질의 체계적인 관리를 목적으로 유해화학물질 취급 기준을 강화하는 법률이다.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 유출 사고를 내면 해당 사업장 매출의 최고 5%에 이르는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