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대기업과 스타트업, 공존의 조건

우리나라에 스타트업 열풍이 불기 시작한 지 3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에게 용어조차 생소했던 스타트업이 하나의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게 하기 위해 그동안 정부, 언론, 투자사, 벤처육성기관 그리고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스타트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쉽게 사업에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들을 지원해줄 수 있는 생태계도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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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도 대기업만큼은 이 생태계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겉돌고 있다. 해외 전시회는 보통 국가별로 구역을 나눠 전시하는 사례가 많은데, 일본이나 브라질 등 우리와 비슷한 스타트업 역사를 가진 국가들의 부스에 후원사인 대기업 로고가 붙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항상 정부기관 마크가 크게 붙어 있고 대기업 로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 스타트업 행사에도 대기업의 참여는 매우 저조한 편이다. 간혹 스타트업 콘퍼런스나 행사에 국내 대기업 직원이 참석하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창업에 관심이 있어 개인적으로 참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테크크런치 등 미국 스타트업 콘퍼런스에서 쉽게 IT 대기업 직원의 명찰을 볼 수 있는 것과는 확연히 비교가 된다.

국내 대기업이 스타트업 생태계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정치와 문화 때문이다.

나는 스타트업 행사에 적지 않은 돈을 후원하고도 기업의 로고를 노출시키지 말라고 부탁한 한 대기업 담당자를 만난 적이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는 “정권이 바뀌면 이번 정권의 스타트업 정책을 후원해준 기업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어 몸을 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차기 정권을 의식하느라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대기업의 기우를 마냥 비난하기보다는 그동안 일관성 없이 진행돼온 벤처육성정책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보수적인 대기업 문화 역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기업 직원들은 회사에서 권장하지도 않고, 특별한 혜택이 있지도 않은 스타트업과의 교류에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해가면서까지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임원들 역시 자신들과 ‘급’이 맞지 않는 스타트업 업계 사람들과의 교류를 꺼리는 눈치다. 만나게 되더라도 비즈니스 상대로 대하기보다는 학교 후배처럼 대하는 일이 잦다.

필자의 지인 중에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에 지원하고 투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한국 스타트업에 대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회사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으니 그런 기술 한 달이면 똑같이 만들 수 있어.”

스타트업의 기술과 그 기술에 담긴 철학을 존중하고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인정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대가를 지불하고 스타트업의 기술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베끼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는 자존심을 지키려다 더 부끄러운 결과를 낳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탱해주는 한 축은 이미 성장한 자국 내 IT 대기업들이다.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스타트업과 기술 제휴를 맺거나 스타트업을 인수한다. 다양한 행사를 후원함으로써 우수한 스타트업을 먼저 찾아내고 자사와의 시너지도 만들어낸다. 이런 모든 과정이 현재 미국의 탄탄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일구는 밑거름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과 같은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해서는 정책이나 규제로는 바꿀 수 없는 이런 문화적인 변화가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수 플리토 대표 simon@flit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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