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우려는 없다”던 정부가 달라졌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디플레이션 우려를 처음 인정한 후 파장은 확산되는 상황이다. 정부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글쎄”다. 기준금리 추가 인하 목소리가 높지만 한국은행은 이달에도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디플레이션 위기, 눈앞에 닥쳤다”…달라진 분위기
디플레이션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작년부터 계속 새어나왔다. 하지만 “아직은 문제없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고, 지나친 우려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앞섰다. 디플레이션 논쟁이 본격 불붙은 것은 지난 연말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마저 디플레이션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며 한국은행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기획재정부 역시 줄곧 걱정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미약하지만 경기 회복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였다. 최 부총리는 “지금은 디플레이션이 아닌 디스플레이션(물가상승률이 지속 하락하는 현상)”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2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0.5%를 기록해 ‘3개월 연속 0%대 물가 상승률’이 현실화 하며 정부도 입장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2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 0.5%는 담뱃값 인상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최 부총리가 한 강연에서 “저물가 상황이 이어져 디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다”고 발언하며 디플레이션은 비로소 ‘눈앞의 공포’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아직 디플레이션은 아니다”는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농산물·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가 2%를 넘는다는 게 주요 근거다. 근원물가는 곡물을 제외한 농산물, 석유류 등 일시적 외부 충격에 따라 물가 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한 장기적인 물가를 의미한다.
전문가 의견은 여전히 엇갈리는 상황이지만 최근 “디플레이션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최근 “2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대비 0.5% 상승해 상승률이 199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며 “이는 디플레이션 초기단계로 볼 수 있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 초기 단계로 분석하는 이들은 유가 하락 영향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저물가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자가 지갑을 굳게 닫는 현상이 문제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재부 한 관계자는 “국민 소비가 활발하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일단 소비를 줄이자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당장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국민이 불황을 실제보다 크게 느끼고 있을 뿐 실제 나타나는 경제 지표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들도 디플레이션 진입을 막기 위해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기준금리 인하가 해결책?…엇갈리는 대안
디플레이션 우려를 씻어내기 위한 대안으로는 기준금리 인하, 재정집행 강화, 임금인상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어떤 방법도 100% 성공을 보장할 수 없어 찬반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대안은 기준금리 인하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수준인 2.0%로 내린 후 4개월 연속 동결을 결정했다. 하지만 상황이 한층 긴박해진 만큼 12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쏠린다.
이번에도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금리인하 효과의 불확실성,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위험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금융투자협회가 국내 채권 보유·운용 관련 종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114명 중 92.1%가 3월 기준금리 동결을 예상했다. 하지만 최 부총리가 인플레이션 우려를 직접 언급하는 등 주변 여건 변화가 한국은행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더라도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 미지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준금리가 이미 낮은 상황이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가계부채 문제가 한층 심화될 것이라는 평가다. 실제 지난해 이뤄진 기준금리 인하와 부동산 규제완화로 가계부채는 지속 확대되는 상황으로, 규모는 상반기 11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디플레이션 해결책으로 재정 집행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공공기관 투자, 설비투자펀드 조성 등 46조원 규모 정책 패키지의 잔여분 약 15조원 중 올해 집행 가능한 10조원을 최대한 조기 집행한다는 목표다. 하지만 지난해 이미 30조원의 자금을 풀었음에도 별다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만큼 큰 기대를 할 수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 다른 정부의 대안은 임금 인상이다. 근로자 임금을 높이면 소비가 늘어 내수진작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다. 최 부총리는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고 일본의 아베 총리는 아예 노골적으로 기업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야는 최근 최저임금 인상 논의에 착수했다. 여야 모두 큰 폭의 인상에 공감하는 분위기여서 오는 6월 최저임금 결정시 역대 최대 인상률을 기록할지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정작 기업 반응은 차갑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이 최근 임금 동결에 나서고 있고 중소기업도 경영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임금 인상은 무리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디플레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실질임금 확대와 가계부채 절감이 시급하다고 분석한다. 효율적인 정책 추진을 위해서는 정부와 국회, 기업이 ‘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밖에 경제주체의 소비 심리 위축을 막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디플레이션 우려 인식부터 해결책까지 각계에서 너무나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정부와 국회, 경제계가 협업 체계를 갖춰 일사불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