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Fintech)가 금융권 최대 화두다. 정부는 물론이고 금융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스타트업까지 모두 핀테크를 외친다. 지난해 3월 박근혜 대통령의 ‘천송이 코트’ 발언 후 핀테크가 금융권을 강타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ICT 기반 금융혁신을 주도해 온 전문가들은 지금의 핀테크 논의가 지나치게 특정 현상에만 집중돼 있다고 우려한다. 국내 금융 환경을 고려하지 않아 우수한 금융IT 인프라를 보유하고도 스스로 핀테크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에 맞는 핀테크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은행 등 금융사는 1990년 후반 일본 금융사의 종합온라인시스템을 도입해 처음으로 금융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이후 20년 만에 차세대 정보시스템을 잇따라 구축하면서 일본 금융사를 능가하는 첨단 IT 인프라를 갖췄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반 실시간 금융거래가 가능한 디지털 금융 선두주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최근 스마트 금융시대를 맞으면서 한국의 핀테크가 중국·미국 등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핀테크 활성화, 우수한 금융IT 인프라 활용
핀테크의 대표 사례로 페이팔·알리페이 등 스마트폰 간편결제 서비스가 언급된다. 이들 서비스는 초기 등록만 하면 언제든지 아이디와 패스워드만으로 결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결제시스템은 각종 인증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카카오페이 등 우리나라도 간편결제 서비스가 등장했지만 아직은 사용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핀테크가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는 가장 큰 원인이다. 대통령의 천송이 코트 발언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간편결제 도입이 늦은 이유는 결제 계좌가 금융사에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금융사는 첨단 IT 인프라를 갖춰 쇼핑몰을 비롯한 모든 결제를 처리했다. 즉 결제 ‘키(Key)’를 금융사가 갖고 있는 셈이다. 해킹과 고객정보유출로 금융사 정보보호가 강화된 것도 이유다. 공인인증서와 안심클릭 등 인증절차를 거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반면에 중국과 미국은 넓은 영토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전자상거래를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선진 금융IT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다. 알리바바나 아마존이 금융회사가 아닌 스스로 결제계좌를 갖고 자체적으로 결제 서비스를 출시한 배경이다. 결제서비스 기업이 자체적으로 계좌를 가짐에 따라 아이디와 패스워드만으로 결제가 가능한 간편결제를 할 수 있다.
P2P(개인 간) 대출이나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논의도 국내 실정에 맞춰 이뤄져야 한다. P2P 대출은 이미 국내에서 크라우드 소싱(펀드) 등의 명칭으로 도입됐다 실패한 사례가 있다. 인터넷전문은행도 지난 2000년대 초반과 후반에 심도 있게 논의된 바 있다. 당시 대형 유통사나 생명보험사가 인터넷전문은행을 설립해 고객 대상 지불결제 서비스를 제공, 수수료를 절감하기 위한 방안으로 논의했지만 금산분리법에 막혀 중단됐다. 지점 수가 적은 지방·특수 은행도 지역적 사업 범위 확장을 위해 도입을 검토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금융IT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등은 핀테크가 발전하게 된 배경이 각각 다르다”며 “국내 현실에 맞게 핀테크 활성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조건적인 해외 간편결제 서비스를 따라하기보다 기존 인프라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한국형 핀테크 개발이 시급하다. 금융공동결제망을 이용해 실시간 자금이체가 가능하고 이를 현금화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형 핀테크, 금융권 혁신이 우선
한국형 핀테크를 활성화하려면 무엇보다 금융사 스스로가 혁신해야 한다. 금융IT 전문가는 “기술은 이미 상상 이상의 금융거래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 발전했다”며 “문제는 금융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경영진의 인식 문제”라고 강조한다.
금융사가 핀테크를 도입, 새로운 서비스를 구현하는 데 주저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기존 사업과 중복된다는 것이다. 핀테크 기반 새로운 서비스가 기존 고객을 뺏어 궁극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과거 증권업계는 온라인전용증권사가 탄생할 때 그러한 이유로 지켜보기만 했다.
증권업계 1세대 최고정보책임자(CIO)는 “과거 온라인증권사 설립 논의가 있을 때 증권사 대부분이 브로커리지 사업 비중이 커 온라인증권사 설립은 기존 수익을 나누는 것에 불과하다고 기피했다”며 “그러나 그때 브로커리지 사업은 온라인증권사로, 기존 증권사는 투자은행(IB)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면 지금쯤 성공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핀테크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하고 기존 사업을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사가 핀테크를 하나의 유행처럼 여기는 것도 문제다. 핀테크는 2000년대 초반부터 금융권이 적극적으로 투자해 온 금융IT의 산물이다. 갑작스럽게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을 담당자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금융IT를 담당해 온 최고정보책임자(CIO)조직에 기반을 두고 핀테크를 논의해야 한다. CIO가 최고디지털책임자(CDO)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충고도 나온다.
IT업계 관계자는 “금융사가 핀테크 벤처기업은 물론이고 인터넷·유통·IT기업과도 협력을 강화해 생태계 조성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형 핀테크로 수출 나서야
해외 진출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저개발국가 상당수는 유선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을 뛰어 넘고 바로 무선 네트워크를 적극 도입해 스마트폰 사용률이 높다. 국내에서 적용된 스마트폰 기반 각종 핀테크 서비스의 수출이 가능하다.
웹케시는 캄보디아에 진출, 금융공동결제망을 구축해 현금자동입출기(ATM)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상계좌 개념을 활용해 스마트폰 문자서비스로 급여이체 서비스도 시작했다. 캄보디아는 ATM이 극소수에 불과하고 은행계좌를 보유한 국민이 30%에 불과하다. 은행 지점 수도 적어 과거 우리나라에 적용했던 서비스를 수출하기에 적합하다.
보안 규제와 일부 금융거래 문화로 국내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전자지갑 등 서비스 수출도 가능하다.
하나금융그룹은 국내에서 개발한 전자지갑 서비스를 캐나다에서 구현한다. 최근 구축을 완료한 외환은행 캐나다법인의 채널·뱅킹시스템인 ‘원큐 플랫폼’에 전자지갑서비스인 ‘N월렛’ 시스템을 추가로 구현한다. 이르면 하반기 캐나다에서 한국형 전자지갑 서비스가 상용화될 전망이다. SK C&C는 2011년부터 전자지갑 솔루션을 미국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