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거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이때 소비자는 개인별로 서로 다른 욕구를 갖고 있으며 이를 빠짐없이 충족시켜주기를 원한다. 반면에 제조자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가급적 최소한의 품종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챙기려 한다. 이와 같은 소비자와 제조자 사이의 상반된 이해관계를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표준이다.
국가는 합리적 표준을 설정하고 이의 이행 여부를 계량과 측정이라는 기술적 바탕 위에서 적합성 평가 제도를 확립, 객관적으로 입증해 표시한다. 헌법 경제편에 명시된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 조항은 표준과 시험인증(적합성평가)의 법적인 근거다.
하지만 표준 자체가 활발한 거래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어떤 제품이 해당 표준에 적합하게 만들어졌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주는 추가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곳이 적합성 평가자로서의 시험인증기관이다.
표준 개념에서 알 수 있듯 국제적인 표준과 시험인증은 국제거래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특히 20세기 들어 가속화된 글로벌 교역은 국제표준과 표준화 단체 설립의 배경이 됐다. 전기전자분야의 대표적 국제표준화기구 국제전기기기위원회(IEC)는 1906년 설립됐으며, 국제적합성평가의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시험소인정협력업체(ILAC)는 1977년 결성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표준과 시험인증은 무역의 글로벌화와 함께 이미 글로벌화됐다고 볼 수 있다.
시험인증은 이미 글로벌화돼 국제적 표준과 적합성 평가 절차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자유무역을 위한 국가 간 협약 등에 의거해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바로 국가 간 그리고 시험인증기관 간 동등성이다. 우리 시험인증기관이 발행한 시험성적서와 인증마크가 글로벌 시장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미 통용되고 있는 글로벌 시험인증기관들과 동등한 수준의 정확성과 신뢰성이 담보돼야 하는 것이다.
정확성은 시험인력, 장비, 운영시스템 등으로 구성되는 품질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부분의 역량은 분야별 편차가 있지만 아직 글로벌 수준의 60~80%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신뢰성 측면에서도 지난해 철도, 원전, 국방 분야 등에서 나타난 위·변조 시험성적서 사태에서 보듯 이해관계로부터 엄격히 독립된 제3자 적합성평가 기관으로서의 높은 도덕성과 신뢰성이 담보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글로벌 시험인증기관인 스위스 SGS, 독일 TUV, 미국 UL 등은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명성을 쌓아왔고 아직도 업무를 수행할 때 ‘제3자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고 있음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술무역장벽 철폐를 위한 TBT 협정에 1980년 가입했다. WTO가 관세로 보호해주던 온실을 걷어냄으로써 국내 기업들이 각자의 기술력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걸 수밖에 없게 했듯이, TBT는 이제 국내 시험인증기관들로 하여금 글로벌 시장에 나아가 실력으로 승부를 가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위기지만 장기적으로는 기회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세계적 수준인 우리 정보통신기술(ICT)을 시험인증 현장에 철저하게 적용해 시험 업무의 품질을 글로벌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세계 8위 수준의 교역량을 국내 시험인증 브랜드를 알리는 플랫폼으로 활용한다면 최소한 아시아 경제권에서 만큼은 시험인증의 한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제한된 국내시장을 두고 국내 기관들끼리 지나친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상호 협력과 협업으로 ‘대한민국 시험인증의 세계화’를 함께 이뤄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960년대 수출검사소로 시작된 우리나라 시험인증 50년 역사에서 2015년은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정확성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국내 시험인증기관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한층 도약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원복 한국산업기술시험원장 boggie@ktl.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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