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플레이 신소재와 장비를 시험 적용·검증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용 ‘파일럿팹’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공공 성격의 팹을 통해 신제품 개발 기간을 단축시키고 더 많은 신규 중소업체들의 시장 진입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디스플레이 후방 산업 육성 방안을 적극 추진 중이어서 국가 주도 파일럿팹 설립을 공론화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다수의 디스플레이 소재·장비업체들이 시제품을 개발해 놓고도 실제 디스플레이 제조에 적용할 기회가 없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신제품 개발을 결국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디스플레이용 신소재를 개발한 A업체는 4년 전에 개발을 완료했지만 개발된 소재를 테스트하고 검증하는데 무려 3년 이상이 걸렸다. 국내 디스플레이 제조업체와 수차례 접촉해 테스트 기회를 얻기까지도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그 사이 글로벌 소재업체가 관련 국내 시장을 잠식했다.
업계 관계자는 “장비업체나 소재업체나 애초부터 특정 기업과 손잡고 기술 개발에 나서지 않은 이상 테스트 기회를 얻기는 매우 힘들다”며 “국내에선 삼성·LG디스플레이를 통하지 않고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이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1~10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개발했는 데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와서 테스트하라고 한다”며 “실제 생산에서 가장 좋은 게 뭔지를 알기 위해 테스트를 요청하는 것인 데 서로의 입장 차가 커 테스트 과정에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고가 설비와 테스트 장비를 갖추는 데 한계가 따른다. 디스플레이 제조업체와 주도적으로 기술 협력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독자적으로 연구에 나서기 힘들다.
김재훈 한양대 교수는 “개발된 소재를 실제 디스플레이 제조 과정에 적용해 보지 않고는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기 쉽지 않다”며 “50인치급 패널 생산이 가능한 파일럿 라인을 갖춘 국가 주도의 연구소나 팹이 있다면 많은 업체나 대학에서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제품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3~4년 전에도 업계 전문가들이 파일럿팹 설립을 주장했다. 당시 정부가 검토했지만 결국 ‘비용’ 문제로 무산됐다. 일각에서는 영리기관에서 수익 서비스로 추진하는 것을 해법으로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반도체 산업에서는 KAIST에 나노팹을 운영 중이지만 국내 주요 반도체 업체들의 기술개발 정보 등에 대한 정보 공유 부족으로 당초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며 “파일럿팹 역시 디스플레이 제조업체들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정노 산기평 PD는 “초기 투자비뿐만 아니라 운영비가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과제”라며 “장비 부분품의 성능을 테스트하거나 중소 업체에 패널 성능을 테스트할 수 있는 인프라 지원 사업 등을 내년 단기 과제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