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의 미디어 공명 읽기]<43>페이지

페이지는 글자나 그림을 일정한 시각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직사각형의 표면으로, 하나하나 순서대로 연결해 책이라는 기록 매체를 만들어내는 형식적인 구성요소이자 정보 표현 관습을 말한다. 페이지는 매클루언의 표현대로 ‘구텐베르크 은하계’라 불리는 문자 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페이지를 빼놓고 책을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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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의 원형적 형태를 보여주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흔히 페이지라는 관습은 기원 후 1~2세기 기독교 문명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의 책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들어진 두루마리(scroll)였는데, 기독교 문명과 함께 책은 지금과 같이 일정한 크기의 페이지들이 묶인 코덱스(codex) 형태로 발전했다. 이렇게 본다면 책은 역사적인 등장 순서로 두루마리 책, 코덱스 책 그리고 현재의 전자책 등 세 가지 형태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페이지 관습은 두루마리 책에는 없었다는 것인가? 길게는 몇 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에 동양의 세로쓰기 방식도 아닌 가로쓰기로 그렇게 길게 문자를 기록했다는 것인가?

두루마리 책을 만든 가장 흔한 소재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이었다. 중국에서 발명돼 중동을 거쳐 서구로 전파된 종이를 지칭하는 말 ‘페이퍼(paper)’는 파피루스(papyrus)에서 왔다.

파피루스를 가공해 만든 긴 ‘종이’가 라틴어로 ‘카르타(charta)’이고, 여기에 하나의 토픽에 대해 쓰인 두루마리 하나를 ‘볼루멘(volumen)’이라 한다. 책 한 권을 의미하는 볼륨이라는 말도 여기서 왔다. 볼루멘마다 ‘티툴루스(titulus)’라는 태그를 붙여 책을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 파피루스의 제작과정과 형식에 대해서는 AD 77~79년 프리니(Pliny the Elder)가 쓴 ‘자연사’라는 책(최초의 백과사전)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긴 두루마리 책을 읽으려면 두 손을 이용해 한 쪽으로 풀고 다른 쪽으로 감아야 한다. 감기고 풀리는 두루마리의 양쪽을 감아 지지해주기 위해 나무로 된 롤러가 사용된다. 감긴 양쪽 사이에 읽을 두루마리 표면이 독자에게 제시된다. 읽는 사람에게 이렇게 제시되는 두루마리의 표면은 다름 아닌 스크린이다!

그 스크린은 가로로 일정한 폭을 갖는 단(column)으로 구성되는데, 단을 의미하는 라틴어가 바로 ‘페이지내(paginae)’였다. 두루마리 책에도 페이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페이지의 폭이다.

카르타에서 여백을 제외할 때 단의 높이는 8~10인치였고, 폭은 2~4인치 정도였다. 흑해에서 발견된 성경 ‘시편’ 두루마리의 단 폭은 8~11㎝인데, 이는 오늘날 종이 책의 표준 판형이 보여주는 페이지 폭과 일치한다!

수천 년을 거쳐 오면서 책의 물리적 소재와 형태는 달라졌어도 페이지 폭은 일정하게 유지돼 왔던 것이다. 이는 바로 텍스트 정보 표면을 읽어내는 인간의 태생적 지각 패턴에 기인하는 것이다. 페이지 폭이 그 정도라야 한 줄을 한 눈에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인데, 가독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구현된 텍스트나 모바일 단말기로 제공되는 전자책도 이런 한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멀티미디어, 하이퍼텍스트 등 정보의 내용과 기술적 구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페이지라는 관습은 ‘책’이라는 이름의 매체에서는 지워버릴 수 없는 ‘유전자’다.

두루마리, 코덱스, 활판 인쇄술, 전자책 등 수천 년간 이어진 책의 화려한 기술 발전 속에서도 인간 지각의 본질적 속성은 공명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leej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