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국가R&D와 대기업

국가 연구개발(R&D) 지원에서 지금도 끊이지 않는 논란거리가 바로 대기업에 지원되는 금액이다.

국민 주머니에서 나온 연간 17조원 규모 국가 R&D 예산 중 10분의 1에 가까운 1조3000억~1조4000억원이 대기업 R&D에 지원될 필요가 있느냐는 논제다. 대기업이 창출한 이익만으로도 ‘이윤추구의 목적성’에 따라 충분히 연구개발을 진행할 수 있는데, 애먼 국민혈세를 쏟아붓는 격이다. 이렇게 투입된 연구의 결과물은 다시 제품과 시장에서의 대기업 독과점으로 이어져 ‘부의 집중’을 부추기고 있다.

민병주 새누리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삼성그룹 계열사에 지원된 국가R&D 예산 총액은 4376억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18개 대기업집단 내 기업에 지원된 총 금액 1조9771억원의 22%에 이르는 규모다.

이달 삼성그룹 계열 상장사의 시가총액은 333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정부 전체예산 355조8000억원과 맞먹는 덩치다. 삼성SDS가 연내 상장하면 시총 규모는 더 불어난다. 삼성공화국이란 칭호가 어긋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 금쪽 같은 국가 R&D예산이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R&D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에 돌아가야 하는 국가 R&D예산은 차지하고라도 대기업집단 내에서 조차 5분의1이 넘는 규모가 삼성에 쏠려있다는 얘기다.

2012~2016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보면 산업기술 R&D에 대한 정부 개입 원칙이 잘 명시돼 있다. 원칙에서 정부는 대기업 등 특정 기업집단으로의 부의 편중 현상이 심각해질 수 있을 때 개입하도록 돼있다. 또 대기업 R&D 지원을 결정할 때 대-중소기업간 차별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지, 다른 정책적 대안과 비교했을 때 효과적인지를 꼼꼼히 따져보도록 했다.

그런데도 세계 스마트폰 1위, 메모리반도체 1위, TV 1위 등의 타이틀을 가진 삼성 그룹에는 국가 R&D 예산이 배정됐고, 지금도 들어가고 있다. 중소기업을 옥죄는 산업 생태계 문제나 시장 정서는 투자 대비 경제 효과에 묻혔다.

삼성은 계열사를 합쳐 지난 1분기에만 4조원 가까운 R&D 비용을 집행했다고 한다. 역시 국가 R&D 전체 규모와 맞먹을 정도다. 정부 R&D 예산을 지원 받아 더 큰 자발적 R&D를 진행하고, 투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부의 집중과 마찬가지로 R&D의 집중, 기술 생태계 장악 등은 필연적으로 역효과를 낳는다. 중소기업이 삼성 우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공의 종착으로 삼을지 모르지만, 그 체인에 들어서는 순간 기업 존폐의 자기결정권 마저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 산업계의 정설이 돼버렸다.

국가 예산에 맞먹는 기업가치, 정부 R&D 예산과 맞먹는 규모의 연구개발 투자, 200조원이 넘는 연간 매출 등을 이뤘다면 이제, 삼성은 정부 R&D 지원을 스스로 거절하는게 맞다.

그 기회를 차라리 R&D에 한번 실패한 기업의 재투자, 창업기업의 상품 개발, 영세 중소기업의 연구인력 고용 등에 돌리는 것이 옳다.

삼성이 우리나라 산업계에서 잃어버린 인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길은 기업으로서 누리는 정부 혜택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