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보유한 최첨단 반도체 기술이 정부의 ‘통행증’을 받고 버젓이 중국으로 나가고 있다. 삼성전자가 10나노대 미세공정에 이어 차세대 핵심 기술로 꼽히는 3차원(3D) 낸드 플래시 기술까지 중국 시안 공장에 적용했다. 삼성전자는 시안 공장 준공식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차기 3D 기술까지 수출 신고 절차를 마쳤다. 미세 공정에 이어 3D 공정 기술까지 연이어, 그것도 정부 허가를 받고 중국으로 나가면서 이제 반도체 산업에서 핵심 기술 수출을 막을 명분은 사라졌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거대 중국 시장을 잡는다는 명목 아래 정부의 규제를 무력화하며 한국이 아닌 중국을 차세대 낸드 플래시 주력 생산기지로 키우는 모양새다.
지난 2011년 12월 6일 삼성전자는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중국 내 반도체 공장 설립을 위한 10나노급 낸드 플래시 국가핵심기술 수출을 신고했다.
국가핵심기술은 기술·경제적 가치가 크거나 관련 산업 성장 잠재력이 높아 해외 유출시 국가안보와 국민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산업 기술이다. 전기전자 분야에서는 11개 기술이 해당된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관련 기업은 정부에 수출 승인 또는 신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정부는 기술 유출 보호장치 등이 마련되지 않으면 수출 중지·금지·원상회복 조치 등을 취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정부 규제를 뛰어넘기 위해 시안 프로젝트 착수를 앞두고 발빠르게 움직였다. 중국 반도체 생산라인에 적용될 기술이 국가핵심기술 목록 중 ‘50나노급 이하 낸드 플래시에 해당되는 설계·공정·소자기술’에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는 당시 1년여 간의 사전 물밑 작업을 거쳐 10나노급 낸드 플래시 수출 건을 신고했다.
기술 유출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세계 최대 시장 중국 공략’이다. 삼성전자는 수출 신고를 하면서 “낸드 플래시를 사용하는 IT기기의 중국 생산 비중이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현지 생산을 확대해 고객 대응 스피드와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고를 접수한 지경부는 산업기술보호 전문위원회를 두 차례 개최한 후 약 한 달 뒤인 이듬해 1월 4일 신고를 수리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이 중국으로 나가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정부는 기술 수출을 허가했다.
전문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정부가 사전 검토를 거쳐 신고를 수리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았기 때문에 위원회가 열린 것 아니었겠냐”며 “전문위는 (수출 타당성보다는) 국민 경제 측면에서 보완 대책을 검토하는데 그쳤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에 특혜를 준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정부 승인이 떨어지자 삼성전자는 산시성 시안을 공장 건설지로 결정하고, 2012년 9월 시안 고신공업개발구 부지에서 기공식을 개최했다. 기공식에는 삼성전자 주요 경영진과 함께 지경부(현 산업부) 고위관료, 자오러지 산시성서기 등 양국 정부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관심이 잦아드는 듯 했던 시안 프로젝트는 이후 삼성전자가 3D 적층 기술을 적용한 ‘V낸드’를 시안에서 양산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논란에 휘말렸다. 1차 수출 신고시 3D 낸드 기술은 정부에 보고되지 않은 탓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점이 제기된다. 삼성전자는 “당시 1차 수출 신고 때는 3D 낸드 양산 기술을 개발하지 않았고, 기술 적용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신고 누락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에서는 최초 신고 당시 10나노대 기술 수출이라는 이슈만으로도 찬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에 논란을 확산시키지 않기 위해 고의로 3D 기술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 법규상 허점도 드러났다. 국가핵심기술 목록에 따르면 3D 전공정 기술은 별도로 분류되지 않고 미세공정에 포함된다. 3D 기술은 후공정 기술만 신고 대상이다. 삼성전자는 10나노대 기술 수출을 신고했기 때문에 굳이 3D 낸드 기술을 별도로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3D 공정이 미세공정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지닌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반대로 중국에 반도체 기술을 내보내야 하는 삼성전자로서는 고마움을 느꼈을 대목이다.
이후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시안 후공정 라인 건설을 위한 기술 수출을 신고하면서 뒤늦게 정부에 3D 기술 도입 건에 관해 설명했다.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시안 공장을 방문한 뒤 또 한번 시안 공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뒤였다.
삼성전자는 올해 들어서도 시안 공장 준공을 두 달가량 앞둔 지난 3월 또 한번의 수출 신고를 했다. 현재 도입한 3D 낸드 기술에 비해 보다 업그레이드된 기술을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엔 전공정 미세공정 기술의 일종으로 신고했다. 이 역시 별 문제없이 수리돼 삼성전자는 시안 공장의 3D 낸드 기술을 한단계 높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국 내 또 다른 3D 낸드 생산시설인 화성사업장에도 같은 기술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중국 공장이 한국에 뒤지지 않는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한국과 기술 시차가 없는 것은 물론 자칫 국내 공장과의 기술 역전도 우려된다.
현재 법규상으로는 정부가 삼성전자를 막을 근거는 없다. 국가핵심기술이더라도 개발 과정에서 정부 R&D 자금을 지원받지 않은 기술은 승인이 아닌 신고 대상이다. 신고 대상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만이 공식적인 검토 대상이다. 방산 기술과 달리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술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근거를 찾기 힘들다. 수출 기업이 일정 수준의 기술유출 방지 대책만 갖추면 사실상 무사 통행이 가능한 셈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기준으로 접근하면 정부가 국가핵심기술 수출에 관련한 기업 활동에 관여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해당 기술이 정부 R&D 지원 혜택을 받았는지 여부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실제 삼성전자의 3D 기술도 국책 과제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놓고 일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차기 3D 기술 수출을 신고하면서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에 14나노 핀펫 공정 기술 라이선스를 제공하는 사안도 별다른 문제없이 통과받았다. 삼성전자가 정부의 기술 수출 규제를 피해가며 원하는 대로 해외로 기술을 내보내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가핵심기술 수출 관련 회의에 참석하는 전문가들조차도 삼성의 기술 수출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다”며 첨단 기술의 잇따른 해외 이전을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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