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지난 2010년 이후에만 해외 연구개발(R&D) 법인 9개를 늘리는 등 글로벌화를 명목으로 해외현지 기술역량을 강화했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네 곳은 정보기술(IT) 시장에서 한국을 맹추격하는 중국에 설립됐다.
앞서 삼성전자의 생산기지 해외 이전으로 촉발된 한국 제조업의 공동화가 R&D 공동화로 번질 전망이다. 지난 1월 박근혜 대통령이 외국인 투자기업 간담회를 직접 주재하며 해외 R&D센터 국내 유치를 강조했지만 정작 한국 기업은 나라 밖에서 R&D 기반을 강화하는 누수 현상이 이어졌다. 정부가 추구하는 고급인력 일자리 감소는 물론이고 국내 인력의 기술 역량 악화를 불러올 것으로 우려된다.
13일 삼성전자 2013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삼성전자 연결대상 종속기업 153개사 가운데 R&D를 주요 사업으로 영위하는 해외 법인(인수합병 법인 포함)은 총 19개로 집계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일본 두 곳에 불과했지만 2000년을 기점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0~2009년 중국·인도·이스라엘·스웨덴 등 다양한 나라에 8개 R&D 거점이 만들어졌다.
2010년대 들어서는 증가 속도가 더 빨라졌다. 2010~2013년 4년 사이에만 유럽·아시아 등지에서 9개 법인이 추가됐다. 중국에서만 4개 법인이 설립됐다. 2010년 중국 삼성모바일R&D센터차이나-광저우와 삼성톈진모바일디벨러프먼트센터에 이어 지난해에는 선전과 시안에 R&D 시설이 들어섰다. 앞서 세워진 것을 더하면 삼성전자의 19개 해외 R&D 법인 가운데 7개가 중국에 있다. 삼성전자의 해외 생산법인 33개사 중 절반에 가까운 15개사가 중국에 위치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해외 R&D 법인의 외형도 작지 않다. 영국 삼성케임브리지솔루션센터는 2012년 말 자산총액이 1274억원에 달한다. 삼성톈진모바일디벨러프먼트센터 자산총액은 지난 2010년 52억원에서 2012년 149억원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과거 미국·일본 등 기술 선진국에 세워진 R&D 조직은 현지 우수 인력을 채용해 앞선 기술력을 활용하는 효과가 있었다. 반면 최근에는 우리의 기술 노하우를 후발 국가에 전해주는 측면이 강하다. 기술 유출이 없더라도 현지 인력이 자국 기업에 재취업하면 삼성에서 쌓은 경험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셈이다.
삼성전자 생산시설 해외 이전 이후 중소 협력사가 삼성을 따라 해외로 공장을 옮긴 전례를 감안하면 R&D 역시 비슷한 모습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제조·생산 공동화에 이어 R&D 공동화가 우려되는 이유다.
정부는 지난 1월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 R&D 센터 유치 등 고부가가치 투자 기반 조성을 담은 외투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의 해외 이전 파급효과가 큰 것을 감안하면 애써 글로벌 기업 R&D 센터를 유치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대기업의 해외 R&D는 선진 기술을 흡수하는 차원이었으나 최근엔 현지 생산시설에 우리 기술을 지원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며 “국내 고급인력 일자리 감소는 물론이고 부품 협력사 동반 해외 이전에 따른 전체 산업의 공동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료:삼성전자 2013년도 사업보고서(2013년말 현재 연결대상 종속기업. 자산총액은 직전 사업연도말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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