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스마트폰의 등장도 없었고,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의 화려한 전시 부스도 찾기 어려웠다.
세계 최대 정보통신(IT)전시회 가운데 하나인 세빗(CeBIT)의 모습이었다. 독일 하노버에서 매년 3월 개최되는 세빗은 2001년에만 해도 참여기업이 8000개가 넘고 방문자 수도 80만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규모의 IT 전시회였다.
그러한 세빗 방문자 수가 올해는 21만명을 넘는 정도라고 보고 있다. 여전히 큰 규모기는 하지만 과거에 비한다면 상당히 줄어든 수치다.
이처럼 세빗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1월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월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MWC(Mobile World Congress) 등 비슷한 분야의 전시회가 한발 앞서 열리기 때문일 것이다.
글로벌 기업이 자체 콘퍼런스를 열어 신제품을 공개하는 경향도 세빗에 대한 발걸음을 줄이는 데 한몫했다. 이렇다 보니 2007년을 전후로 LG전자,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 등 글로벌 기업의 불참 행렬이 이어졌다. 실제로 이번 세빗 2014 현장은 CES나 MWC와 비교할 때 화려하고 역동적인 모습이 덜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빗이 마냥 쇠퇴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전시회가 주로 소비자 대상의 제품과 서비스의 경연장인 것과는 달리, 세빗은 기업 간 거래(B2B)를 타깃으로 하는 전문화된 전시회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개인용 모바일 단말을 통해 기업의 업무를 처리하는 IT 소비자화(Consumerization)가 진행되고 있어 B2B 영역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빅데이터 활용이나 보안 문제 등 최근 중요 이슈는 모두 B2B 영역과 관련된 것이다. 올해 세빗의 메인 테마가 데이터의 지속가능성과 책임감을 뜻하는 ‘데이터빌리티(Datability)’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전문성을 강화함으로써 세빗은 실질적인 투자와 거래가 일어나는 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세빗을 통해 2500만유로(약 370억원)의 투자가 일어났고, 해외 방문자도 지난해에 비해 9%가량 늘었다. 방문자 중 IT 전문가가 92%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경영자의 방문도 34%를 차지해 지난해에 비해 4% 늘었다.
개막식에서는 영국의 캐머런 총리가 참석, 독일과 영국의 5G 이동통신에 대한 기술개발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2008년 불참 선언을 했던 삼성전자는 지난해에 이어 대규모 전시장을 마련해 참여했다. 앞으로 유럽 지역에서 기업 간 거래 시장이 계속 확대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세빗은 겉보기의 화려함은 덜해졌지만 실속이 있는 전시회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세빗 사례에서 보듯이 IT 전시회는 신제품을 소개하는 것 이상으로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다.
IT 분야에서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아시아 시장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매우 높다. 이번 세빗에서도 중국 기업이 대거 참여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유럽과 미주 시장에 집중된 대형 IT 전시회가 아시아권에서도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높은 IT 수준과 중국과 일본을 잇는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국제적인 IT 전시회를 통해 아시아권의 허브로서 역할을 할 충분한 잠재력을 가졌다. 마침 스페인에서 개최되는 MWC의 국내 유치를 검토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단순히 이목을 집중시킬 행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비즈니스 협력과 창출이 이루어지는 전문성 있는 IT 전시회를 구상하기를 기대해 본다.
설정선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 12jss@kto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