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6일 오전 10시 25분경.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검은색 리무진이 경호차량을 앞세우고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청사 앞에 멈춰 섰다. 건장한 청와대 경호원들이 대통령 차량을 둘러쌌다. 이어 청와대 수행 경호관이 사방을 둘러본 후 리무진 뒷문을 열자 김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서 오십시오. 기념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죠.”
김 대통령은 이상철 정보통신부 장관(현 LG유플러스 부회장)과 이용경 KT 사장(18대 국회의원, 창조한국당 대표 역임)의 영접을 받은 후 곧장 정통부 15층 행사장으로 올라갔다. 김 대통령은 이날 초고속인터넷 1000만 돌파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통부를 방문했다.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사회를 맡은 김창곤 정통부 정보화기획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의 안내에 따라 참석자들이 김 대통령을 박수로 맞이했다.
기념식에는 남궁석 국회의원(작고, 정통부 장관 역임), 이용경 KT 사장, 신윤식 하나로통신 회장(체신부 차관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회장), 이홍선 두루넷 부회장(나래이동통신 사장 역임), 오길록 ETRI 원장(한국멀티미디어협회장 역임), 송관호 한국인터넷정보센터 원장(현 숭실대 교수), 조영화 KISTI 원장(한국인터넷정보학회장 역임), 박승철 현대네트웍스 사장, 김지일 텔슨정보통신 사장(머니옥션 대표 역임), 김철환 기가링크 사장, 김형필 인프라넷 사장 등 통신 업계와 연구계 인사, 인터넷 이용 농민대표, 학생대표, 주부대표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4년 전 취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튼튼한 토대를 닦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김 대통령의 그 약속을 실현한 날이기도 했다. 인터넷 1000만명은 당시 전국 1450만가구 기준으로 국민 69%가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함을 의미했다. 1998년 6월 두루넷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한 지 불과 4년여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김 대통령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넘쳤다. 기념식장 전면에는 ‘글로벌 리더 e코리아 인터넷 1000만 돌파 기념식’이란 큰 현수막이 걸렸다.
기념식 단상에는 김 대통령 내외를 중심으로 이 장관과 이용경 KT 사장, 신윤식 하나로통신 회장, 이홍선 두루넷 부회장 등 초고속인터넷 3사 대표가 좌우로 자리를 잡았다.
기념식은 국민의례와 경과보고, 대통령 치사, 유공자 포상, 축하 이벤트 순으로 40여분간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했다.
김 대통령은 경과보고를 받은 후 특유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정보통신 관계자 여러분”이란 말로 치사를 시작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란 말은 김 대통령이 처음 사용한 그의 상징어였다. 정치 행사가 아닌 기념식에서 김 대통령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이날 기념식은 지식정보강국을 강조한 김 대통령에게는 의미가 각별했다.
김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1000만명 돌파는 우리 국민의 진취적인 역동성과 뜨거운 열정이 만들어낸 놀라운 성과로 21세기 지식정보시대에 선진 정보통신강국으로 우뚝 서는 귀중한 발판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지금 우리는 세계 일류의 지식경제강국이 될 수 있다는 분명한 가능성을 곳곳에서 확인하고 있으며 한국 정보화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도 벤치마킹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정보화는 50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세계 일류국가 도약의 기회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토대로 계속 노력해 나가면 가까운 장래에 세계 일류국가의 꿈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며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 최선두의 지식경제강국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 후손들에게 영광되고 자랑스러운 세계 일류국가를 물려주자”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의 감격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담았다.
“역사적인 초고속인터넷 1000만 돌파 기념식을 가졌다. 실로 감격스러웠다. 인터넷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정보화 교육에 힘을 쏟았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인터넷 지식이 곧 무기였다. 온 나라가 인터넷 속으로 들어갔으나 ‘사이버 세상’을 움직이는 인재들이 필요했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정보화 학습은 중산층으로 편입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상철 장관은 이에 앞서 경과보고를 통해 “1998년 6월 국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1999년 4월부터는 전화망을 이용한 ADSL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제공했으며 특히 대통령이 강조한 ‘전 국민 정보화 교육 실시’ 이후 불과 4년 만에 가입자 1000만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됐다”면서 미국의 약 4배, 일본의 약 8배에 달하는 차이로 명실상부하게 보급률 세계 1위를 기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이어 “정통부는 앞으로 국가정보화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강화해 새로운 정보화 비전인 e코리아 2006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정부와 기업, 개인 등 모든 경제주체가 실질적으로 정보화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초고속망 구축으로 인터넷 강국 구현에 공헌한 유공자들을 포상하고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날 김동훈 당시 KT 사업지원단장(KT텔레캅 대표 역임)이 동탑산업훈장을, 김진덕 당시 하나로통신 전무와 오영철 당시 삼성전자 상무가 산업포장을 받았다. 또 임병택(두루넷 이사), 이승일(드림라인 대표이사), 김태수씨(파워콤 상무)가 대통령표창을, 김진하(하나로통신 전무), 박승철(현대네트웍스 대표이사), 황인보(온세통신 본부장), 이옥기씨(KT 팀장)가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김 대통령은 이어 이상철 장관과 기념식의 하이라이트인 ‘초고속인터넷 1000만 가입자 돌파 세리머니’를 했다. 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이 장관, 농민대표, 학생대표, 주부대표 6명은 미리 준비된 대형 마우스를 동시에 클릭하는 것으로 1000만 가입자 축하 이벤트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날 농민대표로는 남한순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정보화마을 추진위원장이 참석했고 주부대표로는 2000년 주부인터넷 금상 수상자인 이숙경씨, 학생대표로는 19회 한국정보올림피아드경시대회 중등부 대상을 받은 강민승군(당시 석관중 2년)이 참석했다.
이상철 장관의 회고.
“김 대통령은 그날 행사에 크게 만족해 하셨습니다. 김 대통령은 1982년 청주교도소에서 앨빈 토플러 박사가 쓴 ‘제3의 물결’을 읽고 충격을 받았으며 한국을 지식과 정보 강국으로 만들고 싶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면서 “정말 기쁘다. 자긍심과 보람을 느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민대표 남한순씨는 고랭지 유기채소를 재배했는데 인터넷을 이용해 전량 판매했다고 하더군요. 모든 게 초고속인터넷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남씨는 KT 광고에도 출연했어요.”
정통부가 초고속인터넷 기념식에 대통령 참석을 청와대 측에 요청한 것은 그해 8월경이었다.
김치동 당시 초고속정보망과장(현 한국엔지니어링협회 부회장)의 회고.
“4년여 만에 초고속인터넷이 세계 최고의 보급률을 기록한 것은 의미가 대단합니다. 더욱이 IMF 위기를 정보화로 극복한 김 대통령은 정보화 대통령을 자임했습니다. 퇴임을 앞두고 지식정보강국의 방점을 둔다는 의미에서 청와대와 협의해 추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희호 여사까지 참석을 요청하자 청와대 측이 대통령의 건강과 일정 등을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 흔쾌히 승낙해 성사된 것입니다.”
대통령 참석이 결정되자 식순이나 내용을 수시로 청와대 측과 협의해 하나씩 결정했다.
기념식 준비의 정통부 업무라인은 김창곤 정보화기획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 아래 정경원 정보기반심의관(현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 김치동 초고속정보망과장, 김정삼 서기관(현 미래창조과학부 인터넷산업팀장), 이재형 사무관(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 보좌관), 조원진 주무관(현 KAIT 팀장) 등이었다. 나중에 임준성씨(현 우정사업본부 보험위험관리팀장)가 영상물 제작을 위해 합류했다.
가장 난제였던 게 마지막 대형 마우스 클릭 이벤트였다.
김 과장의 계속된 증언.
“기념식의 하이라이트인 이벤트를 준비하는 데 콘텐츠가 마땅한 게 없었습니다. 내부 아이디어를 모아 정보통신을 상징할 마우스 클릭을 준비했는데 혹 오작동이라도 발생할까봐 리허설을 여러 번 했습니다. 경호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식 당일 아침에도 리허설을 했습니다. 기계작동이 매끄럽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대통령 행사에 오작동이라도 나보세요. 난리가 날 겁니다.”
이재형 당시 사무관의 기억.
“마우스 클릭 후 자동으로 작동되는 게 자연스럽지 못해 단상 아래 사람이 수작업으로 작동을 하도록 변경했습니다.”
기념식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당초 김 대통령 내외와 함께 이벤트 행사에 청와대 측은 농촌 학생을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정통부는 급히 농촌 학생을 선정해 당일 행사에 부모와 함께 참석시켰다. 그런데 돌연 청와대 측이 이 학생을 빼라고 다시 요청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그 학생은 학교에 대통령 행사 참석을 알렸고 지역에는 소문이 다 난 상태였다. 학생은 울음을 터Em렸고 부모도 “뭐 이런 경우가 있느냐”며 항의했다.
김 과장의 말.
“이를 달래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청와대가 그림이 안 좋다는 이유로 빼라고 한 일인데 그 학생과 부모 입장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정통부는 고민 끝에 학생을 행사장 앞자리에 앉히고 나중에 김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초고속인터넷 1000만명 돌파는 대통령의 강력한 지식정보강국 구현 의지와 정통부의 추진력, 그리고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 등 삼박자가 피운 정보통신혁명의 꽃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