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만 무려 네 차례나 장편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한 역사 인물이 있다. 바로 허준이다. 1975년 ‘집념’, 1991년 ‘동의보감’, 1999년 ‘허준’, 2013년 ‘구암 허준’이란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1977년에는 ‘집념’의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들 다섯 작품 모두에는 한결같이 작가 이은성의 극본이 사용됐다. 이은성은 드라마와 영화 ‘집념’ 이후 완성도를 높인 소설 ‘동의보감’을 1984년 말부터 집필하다 끝을 맺지 못한 채 1988년 타계했다. 2년 후 소설 동의보감은 세 권짜리 책으로 출간됐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동의보감은 수백만부가 팔린 대한민국 대표 밀러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1991년 이후 방영된 허준 드라마 모두는 이 미완의 소설을 극본으로 사용했지만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인기 비결은 뭘까. 허준의 신기(神技)가 아니다. 소설에는 그런 내용이 별로 없다. 이은성이 그려낸 허준의 모습은 신의(神醫)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병자를 포기하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사의 모습,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 심의(心醫)의 모습이었다.
한 평생 인술(仁術)을 펼친 심의는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 “의사 한 번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던 젊은 시절의 다짐을 평생 실천한 고(故) 장기려 박사. 의료봉사에 일생을 바쳤고, 무일푼으로 85세에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인술·봉사·박애·무소유를 실천했다. “나를 기념하기 위해 흉상을 만드는 자는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했던 그다.
나이 칠순에 은퇴 후 94세에 타계하기 전까지 20여년간 강원도 양양지역 두메산골을 찾아다니며 의술을 베푼 고 이기섭 박사. 자가용 없이 아흔 노구에 버스를 두 번 이상 갈아타며 왕진가방을 들고 의료낙후지역 주민을 찾았던 그는 ‘영동지역 허준’ ‘속초 슈바이처’라 불렸다.
“젊은이들이 의대를 지원하는 것이 돈 때문이라면 사업가의 길을 걷는 게 낫다”고 했던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누구도 약을 구하지 못해서 목숨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그는 질병 퇴치에 일생을 바쳐 국제사회에서 ‘백신 황제’ ‘아시아 슈바이처’로 기억된다.
의대 졸업 후 돈과 명예를 버리고 사제가 돼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참사랑을 보여준 고 이태석 신부를 비롯해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 청진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환자 곁을 지키는 심의는 무수히 많다.
지난 10일 의사협회가 14년만에 정부 정책에 맞서 하루 집단휴진했다. 참여율이 낮아 큰 사고는 없었다. 성에 차지 않아서일까. 다시 24일부터 엿새간의 2차 집단휴진을 예고했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응급실 인원 등 필수 의료인력까지 동원할 태세다.
집단휴진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정부와 의료계의 힘겨루기 싸움에 볼모가 된 대상이 애석하게도 병약한 환자들이라는 점이다.
의사가 되려면 선서를 해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다.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배려한다. 나는 종교·국적·인종·정치적 입장·사회적 신분을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해 의무를 다하겠다.”
선배 의사들이 일생을 바쳐 돌봐온 환자들이 오늘날 투쟁의 인질로 전락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최정훈 정보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