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국산 브라운관 TV가 있었다. 20년 넘게 사용했다. 채널을 바꾸는 로터리 손잡이가 접촉 불량이었고 가끔 화면이 일그러지기도 했지만, TV 머리통을 ‘탕탕’ 손바닥으로 치면 금방 멋진 화면을 뿜어내며 즐거움을 선사했다. 평면TV 등으로 세대가 거듭 바뀌어도 우리집 브라운관 TV는 오랫동안 만족을 줬다. 훌륭한 품질이었다. 역시 한국 가전회사가 세계를 석권할 만했다.
장인정신을 가진 기업가가 TV에 출연해 정직하게 품질을 유지하느라 어려움을 겪지만 인간승리를 이룬 장면을 보여준다. 가슴이 뭉클하고 감동의 눈물이 고인다. ‘그래! 나도 사업을 하면 저런 품질의 제품을 만들 거야’라고 결심한다. 품질은 최고의 절대적인 가치라고 배운다.
품질이 과연 절대적인 가치일까? 아니다. 고객은 품질을 사는 게 아니다. 고객은 욕구의 만족을 산다. 그게 항상 품질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품질의 강조가 불필요한 원가를 상승시킨다. 개발자 출신 창업자는 기술지상주의에 쉽게 빠진다. 무엇을 품질이라고 할까? 데이터의 양, 반응 속도, 디자인, 보안일 수도 있다. 제조업은 내구성일 수도 있고, 편리함일 수도 있다.
피터 드러커가 든 예를 보자. 10대 소녀가 구두에서 원하는 가치는 유행이다. 구두에 유행이 담겨 있어야 한다. 가격은 부차적인 문제며 내구성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내년에는 유행이 바뀔 것이니까. 이 소녀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유행은 걸림돌이 된다. 물론 아주 촌스러운 구두를 사지야 않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요소는 내구성과 가격, 편안하게 딱 맞는 것이다. 똑같은 구두가 10대 소녀에게는 최고의 선택일지라도 바로 위 언니에게는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요즘 휴대폰은 살 때는 번듯하지만 1년도 안 돼 심하게 낡곤 한다. 같은 휴대폰도 십수년 전 가치와 지금의 가치가 달라졌다. 실용품에서 패션상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품질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품질은 중요하다. 그러나 가치에 대한 일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나라. 현상을 꿰뚫어 이면을 보는 눈을 열고 머리를 소프트하게 풀어보라. 그 뒤에 고객 만족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가 숨어 있다.
프라이머 대표 douglas@prim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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