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ICT장비 산업 해법
“화웨이의 자체 경쟁력도 무섭지만 정말 두려운 것은 그 뒤에 선 중국 정부와 협력사 생태계입니다. 유선과 무선에서 각 분야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로컬 협력사가 수십개가 넘다보니 가격 수준을 낮추는 것은 물론이고 타임 투 마켓 공략이 누구보다 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 무선 장비업체 CEO의 우려다. 중국은 1990년대부터 화웨이와 ZTE 등 국가 자본이 투입된 ICT 장비 회사를 통해 관련 생태계를 키워왔다.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 회사까지 손길을 뻗쳐 기술과 인력을 흡수해왔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수많은 중소기업(협력사)이 먹고 사는 구조다. 화웨이와 ZTE가 글로벌 점유율을 늘릴수록 관련 중소기업의 먹거리도 늘어난다.
이들 중국 대기업은 5세대(G) 이동통신 등 국가 프로젝트에도 활발히 참여한다. 국가 주도 대형 프로젝트와 자본력이 충분한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이 거대한 고리를 이루며 견고한 생태계를 유지한다.
◇생태계 핵심이 될 메가 프로젝트 복원 필요
우리나라는 대기업보다는 대형 국책과제로 생태계를 만들어왔지만 최근 10년간 이렇다 할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다.
과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국책 R&D는 큰 성과를 기록했다. `전전자교환기(TDX)`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우리나라가 이동통신 역사에서 쾌거로 꼽는 일명 `메가 프로젝트`다. TDX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CDMA는 첫 번째로 상용화했다.
TDX는 1980년대 초반으로서는 파격적인 1076억원 개발비가 투입됐다. 10억원대 R&D도 흔치 않던 시절이다. 국산 TDX 개발은 전화 품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ICT 장비 생태계를 태동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CDMA 역시 896억원이 투자된 대형 사업이다. 1989년 1월부터 개발을 시작해 1996년 12월까지 만 8년을 꼬박 집중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따르면 CDMA 개발로 파생된 경제적 효과는 125조원이 넘는다.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65조2000억원 고용유발은 142만명에 이른다.
TDX와 CDMA 이후 우리나라는 통신 분야에서 메가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와이브로는 용두사미에 그쳤다.
ETRI 출신 한 대학 교수는 “2000년대 들어 예산이 분할되고 국책과제 사이즈가 작아지며 R&D 프로젝트가 `연구를 위한 연구`에 그치는 케이스가 늘었다”며 “애초부터 상용화 부담이 크지 않은 R&D다보니 관리도 쉽지 않았고 기간과 목표만 달성하는 식으로 개발 역량이 분산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관계자는 “초고속인터넷 붐과 더불어 한국이 국제 기술표준 재정 등에 상당히 기여했지만 이를 시장성 있는 상품으로까지 만들어내지 못했다”며 “달 탐사 기술은 있지만 이를 우주로 태워 내보낼 로켓이 없는 것”에 비유했다.
◇A~Z까지 사이즈 불리기 시급
국내 업계는 장기적으로 코어부터 가입자단까지 모든 분야를 커버할 수 있는 거대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구체적인 청사진과 삼성, LG 등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산 유선 장비 공급사 한 사장은 “현재 수준의 지원과 로드맵으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며 “5G가 됐든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크(SDN)가 됐든 하나의 어젠다 아래 산업 전체가 집중할 수 있는 대형 아이템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ICT 장비에서 인터넷프로토콜(IP)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전송, 교환 등 각 분야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도 이같은 전략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이미 시스코 등 글로벌 선도 기업은 자사 백본 장비에 전송 기능을 추가한 제품을 출시했다.
통신사가 투자비 절감과 관리가 쉬운 단순한 구조의 망을 원하며 `스마트` `올인원` 네트워크 장비의 수요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각 파트별로 제품과 기술력을 보유한 국내 업계 설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좁아질 전망이다. 실제로 KT는 지난해 시스코 장비를 엔드투엔드로 자사망을 교체하는 작업을 검토했다.
전송장비 업체 관계자는 “스마트나 올인원 장비를 구축한 통신사 레퍼런스만 생기면 기존 ICT 장비 패러다임 전환이 빨라질 것”이라며 “국내 업체들은 사실상 이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정부는 최근 5G 포럼을 출범하는 등 차세대 네트워크 개발에 시동을 걸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출연연 등이 고루 참여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액션보다 개념 정립에 집중하는 단계다.
5G 포럼에 참여 중인 한 업계 관계자는 “다음 세대 통신을 논의하는 정부 프로젝트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머물러 있다”며 “홀로그램 등 어떤 서비스를 구현할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아 국가-대기업-중소기업이 ICT 인프라 생태계 구조를 재편할 수 있도록 대규모 R&D를 제시하는 등 디테일하게 정책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