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파운드리, 출발은 고객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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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한국UMC 지사장

반도체 외주생산(파운드리) 본고장인 대만에서 직간접으로 20여년을 종사하면서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 성장을 바라볼 때마다 감회가 남달랐다.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대기업 내 개별 설계 조직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듯했던 한국의 반도체 설계(팹리스) 산업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대형 파운드리 업체까지 생겨났다.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의 우산까지 펼쳐져 있어 팹리스 사업하기 좋은 환경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직접 겪어보니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꽤 많다. 10여년간 한국 팹리스는 수도 증가하고 다양한 응용제품을 개발했다. 수치만 보자면 괄목할 성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양산`이라고 부를 만한 수량을 생산하고 있는 업체는 상위 20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는 것을 회사의 가장 중요한 성장 목표로 삼고 있었다.

편중 현상도 심각했다. 흡사 농촌 지역에서 배추가 좋다고 하면 배추농사로, 고추가 잘된다고 하면 고추농사로 몰리는 것처럼 팹리스 역시 그때그때 `킬러 제품`으로 품목이 편중돼 성장해 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도 60% 이상 업체가 디스플레이나 모바일 분야에 쏠려 있고 고객사도 삼성·LG 전자부품 계열사를 바라보는 게 전부다.

자본이 영세한 팹리스로서는 국내 내부거래시장 양산 가능성이 가장 큰 제품에 집중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에 채택될 수 있는 기술력과 장기적인 성장동력을 갖추고 있는 업체는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열악한 상황일수록 대기업, 팹리스, 파운드리 삼각 가치사슬 안에서 어떻게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대기업은 항상 새로운 기술, 경쟁력 있는 제품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고자 한다. 자사의 제품 정책과 방향을 외부에 노출하기 꺼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팹리스에 제공하는 정보는 제한적 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시스템온칩(SoC) 개발에 나서면서 실적이 급감한 엠텍비젼, 코아로직 등처럼 대기업 정책에 따라 팹리스 업계가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높다.

팹리스는 어떻게든 대기업의 수요를 잘 파악해 경쟁자보다 좋은 성능의 제품을 저가로 공급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 구조다. 파운드리는 대기업과 팹리스의 역학관계를 주시하면서 어떤 팹리스가 양산 가능성이 있는지 파악하고 발굴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각자의 현재 고객에 주목하는 것이다.

세계 5위 팹리스기업 미디어텍은 지난 1997년 광학디스크드라이브(ODD) 칩 사업에 뛰어들었다. 첫 제품을 출시하고 LG히타치에 납품했지만 완제품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ODD의 시스템 오류 가능성이 있었지만 미디어텍은 각 분야 인재들을 새로 고용하고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고객사에 파견했다. 인쇄회로기판(PCB)과 완제품을 직접 제작하고 실험해 ODD 시스템 자체의 설계 문제점을 바로잡아줬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칩뿐만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이해하게 됐고, 칩과 주변 부품들을 연계해 레퍼런스보드를 제공하는 `솔루션` 업체로 발돋움했다. 솔루션은 미디어텍이 중국 모바일 업계에 진출하는 토대가 됐고 이제 반도체 칩 회사가 시스템 업체에 솔루션을 제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됐다. 이 회사는 이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시장에서 퀄컴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에는 삼성전자·LG전자라는 글로벌 완제품 기업이 있다. 200여개에 이르는 팹리스도 있다. 중소기업이라서, 환경이 열악하고 자본이 부족하다며 불평이나 변명만 하기에는 고객사의 아픈 곳을 긁어주며 성장한 미디어텍의 사례가 시사하는 너무 바가 크다.

김영일 한국UMC 지사장 martin_yi_kim@um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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