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말 세계 반도체 시장을 깜짝 놀라게 한 빅딜이 발표됐다. 각각 장비 업계 1위와 3위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와 일본 도쿄일렉트론(TEL)의 전격적인 합병 소식이었다. 양사는 내년 하반기 경영 통합을 목표로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 미국·유럽 등지에서 기업결합 심사를 받고 있다.
합병이 승인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단지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거대 공룡이 탄생한다는 정도는 너무 순진한 우려다. 반도체 설비 투자 침체로 경영 사정이 어려워졌다, 반도체 미세 공정 기술이 더 진화하면서 장비 개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등등. 양사가 밝힌 합병 배경은 그저 `공식`적인 수사일뿐이다. 국적과 기업 문화가 다르고 서로 경쟁해왔던 그들이 합병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진의는 따로 있어 보인다. 나아가 그 배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소설 같은 시나리오가 내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미국은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을 지배하는 나라다. 최근 첨단 제조업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금융 자본이 제조업을 직접 거느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AMAT의 대주주도 펀드이고, 미국 대표 기업 애플도 속성상 금융 자본이나 매 한가지다. 미국의 국익 논리를 우선하는 전제에서 만약 AMAT·TEL의 합병 이면에 미국 금융 자본과 애플이 숨어 있다면 그 파괴력은 어떨까. 가공할만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AMAT과 TEL의 특허 경쟁력이 반도체 산업 전반을 쥐고 흔들만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 제조 공정은 양사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하다. 문제는 첨단 전자 산업을 비롯해 자동차·기계 등 주력 산업에서 시스템 반도체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반도체 강국이라 자부해도,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완제품 경쟁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AMAT과 TEL이 마음만 먹으면 핵심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애플도 어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직접 설계하면서 시스템 반도체 기술을 놓치 않고 있다. 비록 지금은 자국내 제조업 기반이 취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미국이지만 실은 더 무서운 저력이 느껴지는 이유다. 제조업 생태계가 붕괴되면서 체질이 약해진 일본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결국 이번 딜은 위기에 처한 TEL에게 합병 지주회사 회장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명분`을 주고, 미국 자본이 실질적으로 장악해 `실익`을 취하려는 것으로도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상상조차 싫은 이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우리는 언젠가 궁지에 내몰릴 게 뻔하고,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 없다. 올 들어 정부는 크고 작은 시스템 반도체 지원 사업 예산을 적잖이 삭감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주력 산업 과제들이어서 창조경제의 신산업 육성 콘셉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정부가 얼마전 발표한 반도체 산업 재도약 전략에서도 위기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삼성전자만 쳐다보고 있지만 적어도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역시 미국 기업인 퀄컴을 따라잡기 요원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미국의 야심에 대한 음모론이길, 그래서 과다한 기우에만 그치길 바란다. 만에 하나 한국 제조업이 종속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정부와 산업계, 나아가 우리 모두가 미래를 대비하고 고민해야 한다. 일단 위기감을 갖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