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1주년 특집3-창조, 기업에서 배운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부활한 필립스

`필립스를 버려 필립스를 살렸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역설이지만 필립스의 부활을 가장 잘 설명한 말이다. 올해 창업 122주년을 맞은 필립스는 1990년대까지 세계 최대 전자업체 중 하나였다. 30만명을 웃도는 임직원에 백열전구부터 원자로까지 상품만 5만가지가 넘었다. 1960년대 카세트테이프를 시작으로 1980년대 콤팩트디스크(CD)와 1990년대 CD레코더에 이르기까지 필립스가 처음 만든 제품도 하나둘이 아니다.

[창간 31주년 특집3-창조, 기업에서 배운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부활한 필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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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의 변화를 잘 읽을 수 있는 `앰비언트 익스피리언스`. 기술에 디자인을 더해 고객 만족을 실천한다.

21세기 들어 필립스 왕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1년 매출은 1996년에 비해 30%나 줄었다. 창사 이래 최대 영업손실을 냈고 주가는 3분의 1로 급락했다. 비대한 공룡처럼 멸종할지 아니면 민첩한 포유류로 진화할지의 기로에 섰다. 필립스가 선택한 카드는 바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꺼낸 구조조정이다.

◇심장을 도려내고 부활한 필립스

지난 5월 열린 필립스 주주총회에서 눈길을 끄는 하나의 결정이 내려졌다. 정식 회사 이름을 `로열 필립스 일렉트로닉스`에서 `로열 필립스`로 바꿨다. 단어 하나를 뺀 결과지만 의미는 매우 크다. 10년 넘게 이어온 사업 구조조정의 결과 더 이상 필립스가 전자업체가 아니라는 공식 선언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필립스는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주력사업이다. 2000년 6개이던 주력 사업은 현재 3개로 줄었다. 반도체와 부품, IT서비스를 과감히 버렸다. 특히 반도체 사업 정리는 안팎으로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2006년 제럴드 클라이스터리 필립스 회장이 반도체 사업 매각을 발표하자 `심장을 도려내고 살 수 있는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반도체 매각은 그 정도로 파격적 조치였다.

지금은 사업 부문이 의료기기와 조명, 가전으로 정리됐다. 절반에 가까웠던 가전 매출 비중은 19%로 떨어졌다. 3개 부문 중 가장 적다. 대신 8%에 불과했던 의료기기 매출 비중이 현재 44%로 껑충 뛰었다. 조명도 13%에서 37%로 약진했다.

일본에 이어 한국이 주도권을 넘겨받은 전자 산업 대신 경쟁이 덜 심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신수종 사업을 육성했다. 선진국 중심으로 다가오는 고령화사회를 미리 간파하고 대규모 인수합병을 단행해 의료기기 사업에 투자했다. 친환경 조명 시장도 선점했다. 필립스 매출 중 소비재는 급격히 줄고 기업 거래(B2B)가 70%를 차지한다. 최근 쓰가 가즈히로 파나소닉 회장이 `B2B 강화`를 선언했지만 필립스는 한걸음 앞서 실행에 옮겼고 이제 성과를 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2001년 필립스는 26억유로(약 3조7600억원)의 적자를 냈다.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친 2012년에는 유로존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도 2억유로(약 2900억원)의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경쟁자 활용`과 `시간차 스핀오프`를 배우자

니혼게이자이는 최근 `필립스 부활의 교훈`이란 기사를 비중 있게 실었다. 필립스 구조조정의 성공을 타산지석 삼아 무너진 일본 전자산업을 일으켜세울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다. 니혼게이자이는 필립스 구조조정에서 배울 점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우선 `아시아 파워 활용`이다. 필립스는 전자 산업 비중을 크게 줄였다. 대신 브랜드 라이선스를 이어갔다. 대상은 아시아 신흥국가 가전 업체다. TV는 대만 TPV테크놀로지와 합병 회사를 만들어 넘겼다. 필립스 지분은 절반 이하다. 휴대폰은 중국 기업에, 오디오는 일본 후나이전기에 매각했다. LG필립스LCD도 결국은 지분 전량을 함께 세운 LG전자에 팔았다.

필립스 출신으로 유럽 유명 비즈니스스쿨 IESE에서 일하는 얀 우스타벨드 교수는 “필립스는 아시아 기업과 피흘리는 경쟁을 피한 대신 비주력 사업의 매각 파트너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전자업체도 수익이 나지 않는 일부 사업을 중국 등에 매각한 사례가 있지만 필립스는 훨씬 대담한 행보를 걸었다.

다음은 `시간차 스핀오프`다. 필립스 반도체 부문은 현재 NXP라는 독립 법인으로 운영된다. 2006년 분사를 발표했지만 그 과정은 오래 걸렸다. 분사를 결정하고도 필립스는 NXP 주식을 계속 보유했다. 4년 후에나 모두 넘겼다. 필립스 측은 그 이유를 “우리가 갑자기 발을 빼면 고객은 불안에 빠진다”며 “고객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시간을 두고 분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고객과 임직원처럼 이해당사자와 합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행동은 서구 사회보다는 동양적 정서에 가깝다. 필립스는 구조조정의 완급조절을 알았다. 의사 결정은 빠르고 단호했지만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참고 기다렸다.

◇새출발 필립스 디자인에 주목한다

아직도 필립스의 변신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기술에 집착한 반면 이제는 디자인이라는 가치를 더했다. 디자인이 경쟁력이라는 말이다.

이는 필립스 주력 사업인 헬스케어 산업에서도 꽃피웠다. 의료 현장을 근본부터 바꾸는 `앰비언트 익스피리언스(Ambient Experience)`가 대표적 사례다. 환자가 병실 조명을 시작으로 오디오와 비디오를 선택해 치료 과정에 참여를 유도하는 필립스의 디자인 솔루션이다. 환자는 직접 고른 병실 환경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앰비언트 익스피리언스는 환자의 안정을 도와 의료진 업무를 수월하게 돕는다. 환자 재방문 유도는 당연한 결과다. 2007년 미국에서 상용화된 이후 올해 1월 앰비언트 익스피리언스 도입 병원이 500곳을 돌파했다. 의료진과 환자는 앰비언트 익스피리언스 효과에 76%나 동의했다.

필립스 사업 부문 매출 구성 변화


장동준기자 dj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