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안식년을 맞아 미국대학에서 1년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40평생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둔 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경험했다. TV를 사러 간 미국의 대표적 가전제품 체인 `베스트바이` 매장 입구에는 일본TV가 아닌 한국의 삼성전자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교포도 불과 3~4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제품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처박혀 있었는데 격세지감이라며 감격스러워 했다.
이 같은 변화는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국내 기업들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꾸준히 투자해 왔고, 정부 역시 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한 결과다. 2001년 국가경제자문회의는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기술), CT(문화기술)를 국가의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으로 채택했다. 기존 기술이 주로 굴뚝산업으로 상징되는 중화학공업에 중점을 두었다면, 21세기는 과학기술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전환될 것임을 의미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기술과 인터넷의 빠른 보급을 바탕으로 가시적 성과도 나타났다. 특히 전자와 반도체 기술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지식과 기술에 기반을 둔 정보통신 관련 산업은 한국경제의 새 대표선수로 성장했다. 현재 디지털TV에서부터 최첨단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보통신 상품들은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집약 산업은 끊임없는 투자와 혁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언제든 도태된다. 아이폰이 등장하기 전 `오바마폰`이라고 알려지면서 초기 스마트폰을 이끌었던 블랙베리는 이제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 매물로 나왔고, 세계 휴대전화시장의 30% 이상을 차지했던 노키아는 이제 자신의 안방인 핀란드에서조차 삼성전자에게 1위를 빼앗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야말로 갈라파고스의 비극이 일본 가전업체에 이어 스마트환경에 뒤쳐진 노키아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화웨이 같은 중국 후발업체에 의해 우리 기업들도 이런 증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반도체와 디지털TV, 스마트폰을 이을 후속 상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이폰 이후 하이테크 분야에도 감성과 상상력이 내포된 CT가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한국의 첨단상품에는 ICT를 기반으로 한 하드웨어적 세트(완제품) 제품 단계에 머물러 있다. 기술 기반의 패스트 팔로어 전략에 머물러 산업의 구조적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콘텐츠다. CT에 대한 다양한 투자와 정책적 뒷받침이 구체화돼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ICT 산업이 기기와 플랫폼이라는 인프라에 중점을 뒀다면, 앞으로는 플랫폼 위의 각종 기기 안에서 유통되는 콘텐츠라는 무한번식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CT와 조화로운 융합에 힘을 쏟아야 한다.
현 정부의 핵심적 정책기조인 창조경제가 IT에서 CT로의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공문화 서비스에서부터 관광, 교육, 영화나 게임 등의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스토리와 철학이 담겨 있는 CT와 연동시키는 전략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공학적 기술력과 인문학적 감성을 예술적 가치로 융합시키는 CT야말로 창조경제의 중심축이다. CT는 향후 20~30년간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성장동력이 충분히 될 수 있다. 창조경제의 정책 방향은 당장 몇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먹거리를 만들기보다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의 체질을 바꾸는 프로젝트로 진행돼야 한다.
다행히 미래부와 문화부를 중심으로 CT 분야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문화산업 육성을 위한 비전과 정책들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문화부의 `콘텐츠산업 진흥계획`과 미래부의 `펑요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런 정책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CT 중심의 창조경제는 빛을 발할 것이다. 10년 후 CT강국 한국의 역량을 만든 데는 현 정부의 창조경제가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를 듣기를 희망한다.
성동규 중앙대 신문방송학부 교수 dksung@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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