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화평법 면제 조항 삭제, 무엇이 문제

화평법 무엇이 문제인가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소량 면제` 조항 삭제다. 유해법(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100kg 이하 소량에 대해 면제해줄 뿐이었으나, 그 파급 효과는 컸다. 먼저 새로운 물질을 테스트해보고 연구개발(R&D)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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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법에 따라 등록해야 할 대상은 `제조·수입` 기업이지만, 첨단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소재기업들과 협력해야 할 스마트폰·자동차 기업들도 직격탄을 맞게 됐다. 검증되지 않은 물질을 사용하다 일어나는 사고를 막겠다는 취지가 엉뚱하게 제조업의 R&D를 원천적으로 막는 결과를 낳고 있다. 다른 법과의 모순은 물론이고 국가 전체 기조를 역행하는 문제도 있다.

◇글로벌 소재기업 R&D 지었는데, 다시 돌아가야 하나

해외 소재 기업들은 국내 반도체·자동차 등 첨단 제조 기업들과의 협력을 위해 한국에 R&D센터를 짓기 시작했다. 전자 산업에서 세계 최고인 한국을 고객으로 확보하기 위해 제 아무리 콧대 높은 글로벌 기업이라도 국내행을 결정했다. 과거에는 본사에서 개발한 제품을 한국에 적용하는 정도의 기술 지원을 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아예 한국 고객을 대상으로 새로운 물질까지 개발하는 진정한 의미의 R&D 센터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과 지근거리에서 소통하면서 신제품을 보다 빨리 개발하기 위해서다. 소재의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지다보니 밀착 대응은 필수 요소가 됐다. 소재 기업들이 새로 만든 제품을 국내 기업에 제공하면, 이를 테스트해보고 다시 업그레이드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R&D가 이뤄졌다.

국내 기업들도 소재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반도체 공정에서 14나노의 벽을 넘고, 차세대 디스플레이 능동형(AM)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의 수명과 효율을 개선하는 일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소재 개혁이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까지 왔기 때문이다. 연비 향상을 위한 자동차 경량화나 깨지지 않는 스마트폰도 소재 혁신에 달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화평법이 면제 조항을 없애면서 날벼락을 맞았다고 하소연한다. 국내 기업들의 테스트 자체가 불가능해진 마당에 R&D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예 국내 기업들의 일부 R&D 기능까지 해외로 이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정이 이쯤 되면 국내에는 양산 라인만 남게 된다. R&D 기능이 줄어들면 고급 일자리 창출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올 초부터 몇몇 글로벌 소재 기업들은 국내에 지은 R&D 센터를 중국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화장품·신약은 면제, 화장품·신약 원료는 등록하라?

화평법에도 예외 조항이 있다. 약사법·농약법·화장품법·식품위생법 등 별도 법에 의해 규제를 받는 제품들과 그 원료들은 화평법에 따른 평가와 등록을 면제받고 있다. 하지만 그 원료를 만드는 원천 재료들은 화평법의 적용대상이 된다. 소량 면제조항까지 없어지면서 나타나는 모순점이다.

R&D가 힘들어지면서 유해물질 사용을 줄이려는 화평법의 취지도 화평법과 충돌한다.

유해 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물질을 개발하려고 해도 이런 제한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화평법 5조는 “유해화학물질의 사용을 줄이거나 유해화학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 또는 신기술 개발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친환경 물질이라도 신규 물질이라면 반드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같은 화학물질이라도 화장품 원료가 되면 평가를 면제받고 첨단 재료가 되면 평가를 받아야 하는 문제도 있다”며 “또 그 원료는 되는데 원천 재료는 안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영업비밀도 포기해야 하나

첨단 소재는 수십가지의 화학 물질을 혼합해 특성을 만든다. 세제의 향기를 내는 데에도 10여가지의 화학 물질이 결합된다. 어떤 물질이 사용됐는 지와 조성 비율 등은 대부분 영업 비밀이다. 하지만 모든 물질을 평가하고 등록해야 하는 기준에 따르게 되면 영업 비밀을 지키기 어려워진다. 거부감은 글로벌 기업들이 크다. 전 세계 시장을 고려했을 때 영업 비밀을 공개하느니 한국에서 사업을 포기할 가능성도 크다. 화평법은 공급망 내의 화학물질 정보를 공유할 때 혼합물 조성이나 특정 사용 정보 등도 정부기관 외 제 3자와 공유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유연한 정책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환경부도 이에 대해 공감한다는 눈치다. 이미 환경부는 정부입법안에서 이를 반영했으며, 오히려 기존의 소량 면제 기준까지 높여 놓은 상태였다. 환경부 관계자는 “소량 면제 등은 당연히 반영되어야 하는 조치”라며 “시행령과 시행 규칙 제정 과정에서 합리적인 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신두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아무리 첨단 신소재라도 오남용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하지만 신산업 창출을 막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법 시행 준비 단계에서 제한 규정을 구체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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