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문화로 읽다]사랑받지 못한 유년 시절이 흉악범을 만든다

교도소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에서 부상을 입은 한 수감자가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으로 실려 온다는 소식에 병원 내 의료진이 모두 긴장한다. 부상 환자는 사형 집행일이 얼마 남지 않은 1급 사형수였기 때문. 그를 치료하게 된 레지던트 과정의 메러디스 그레이는 과연 그를 살리는 게 맞는지 고민한다. 사형수는 그레이에게 자신이 수많은 여성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잔인하게 학대당한 기억 때문에 흉악한 범죄자가 됐으며 더 이상 삶에 애착이 남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형수는 그레이에게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 자신을 살리려는 시도를 말라고 부탁한다.

Photo Image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의사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미국 드라마 `그레이스 아나토미` 시즌 5의 한 에피소드다. 죽어가는 사형수를 다룬 이 에피소드는 몇 회에 걸쳐 방송됐다. 사형수는 자신이 어린 시절 학대를 피해 싱크대 밑의 좁은 공간에 숨어 지냈으며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숨어서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싱크대 안에 놓인 세제 박스들의 상표를 보면서 글을 익혔다고 고백한다. 과연 순수한 어린아이였던 그가 잔인한 살인자가 된 것은 어린 시절을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을까.

1945년 오스트리아 의사 레네 스피츠는 두 곳의 수용 시설에 자라나는 아이들을 연구했다. 하나는 여성 죄수들이 아이를 위한 교도소 내 탁아소였고 다른 하나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모아서 돌보는 기아 보호소였다. 객관적인 조건은 기아보호소가 월등히 좋았다. 당시 사회적 견해는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아이를 격리시키고 깨끗하게 소독된 담요 위에 혼자 놓아두라는 것이 좋다는 거였다. 기아보호소 아이들은 인력이 부족한 탓에 보모의 손길을 충분히 받지 못했는데, 이들 중 20~30%은 입소 첫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반면 탁아소는 많은 아이들이 한데 엉켜 뒹굴었지만 죽은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스피츠는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이고 깨끗한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담긴 손길이 없다면 점점 생기를 잃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비슷한 연구는 또 있다. `사랑을 발견한 학자`로 유명한 해리 할로 박사는 붉은털 원숭이를 이용했다. 원숭이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떼어내 완전히 살균 소독된 우리 안에서 홀로 지내게했다. 하지만 원숭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죽었고 살아서 어른으로 자란 원숭이도 다른 원숭이들과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폭력적이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짝짓기 계절에도 이성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정상적인 발달 과정 속에서 건전한 관계의 고리를 엮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아이때의 초기 애착 관계 형성이다.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면 첫 단추를 잘못 꿴 옷처럼 이후 관계는 모두 어긋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대상,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엄마인 경우가 많다. 이런 아이는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가지고 넓은 세상으로 뛰어드는 적극성을 보이며 타인과 상호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숙한 어른으로 자란다. 사랑을 배우는 것은 삶을 배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허정윤기자 jyhur@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