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휴대통신(PCS) 특별감사 애기가 나왔는데 이 문제는 명확히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감사원에 특별감사를 요청하세요.”
1998년 2월3일 오후 4시 10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인수위 전체회의를 주재하면서 이같이 지시했다. PCS 특혜의혹이 정보통신부에 메가톤급 뇌관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김 당선인은 이날 이종찬 위원장(국가정보원장 역임, 현 우당장학회 이사장)을 비롯한 각분과 위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주요 업무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최명헌(노동부 장관 역임) 경제Ⅱ분과 간사는 문민정부 최대 이권사업으로 불리는 PCS사업자 선정과정에 비리의혹이 있다고 보고했다. 최 간사는 이런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PCS 특별감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경제Ⅱ분과는 차기 정부의 정보통신 분야 검토사업으로 △PCS사업자 선정과정 △CT-2 △통신비밀보호 대책 △우정사업 경영효율화 및 우체국의 종합행정 봉사 창구화 등 4개 분야를 확정해 보고했다.
◇PCS사업
정보통신부가 1995년 12월 15일 PCS허기신청 공고 후 허가신청 접수(1996년 4월 15일) 1개월 전에 갑자기 허기신청을 수정 공고해 업체의 신청 준비에 혼란을 초래하고 특정업체 선정을 유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또 기존 이동전화 2개사가 있는데 3개의 PCS사업자를 추가 선정해 과당경쟁 및 중복투자를 불러왔다. 인수위가 의혹규명에 한계가 있고 심시위원별 평가표 지표를 볼 때 불공정성 및 사전 내정여부의 의혹이 있다. 따라서 감사원 특감, 나아가 검찰의 관련 인사 금융계좌 추적 등 철저한 수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
◇CT-2
휴대전화 보편화로 1995년 허가공고 당시 이미 사업성이 없었다. 전국 사업자 1개, 지역사업자 10개를 허가해 중복투자가 발생했다.
◇통신비밀보호
감청 및 수사정보제공에 대해 제도 개선을 하도록 했다. 긴급 감청은 수사 편의상 법원의 허가서 없이 48시간 가능하다는 점에서 남용을 막기 위해 원칙적으로 검사의 지휘서 아래 실시하도록 했다. 급박할 경우는 소명자료와 24시간 안에 검사 승인서를 받도록 개선했다.
◇우정사업
2003년까지 전국 주요 거점도시에 31개의 우편물 처리기계화 집중국을 설치하고 우편전산망을 고도화해 생산성을 높여 나간다. 우편물 방문판매 배달제와 통신판매업, 임대업 등 신규서비스를 추진한다. 정부부처 민원서류 발급 서비스로 우체국을 종합행정 봉사창구로 활용한다.
김 당선인이 지시한 내용이 전해지자 정보통신부와 관련 업체는 비상이 걸렸다.
김 당선인이 PCS 특혜의혹을 밝히기 위해 감사원 특별감사를 지시한 이상 그 파장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통부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PCS 특혜의혹 제기는 국민회의가 차기 집권여당이 됨에 따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보통신부가 PCS사업자 선정을 발표한 직후인 1996년 6월 12일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는 정동영 대변인(통일부장관, 열린우리당 당의장 역임, 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통해 “사업자 선정에 흑막이 있으므로 이석채 장관(청와대 경제수석 역임, 현 KT 회장)은 국민에게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정 대변인은 흑막의 근거로 △점수를 공개하자 않은 점 △추첨제를 채점방식으로 변경한 점 △경제력 집중을 완화한다면서 중소기업을 탈락시킨 점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한솔PCS를 비제조업체군의 사업자로 선정한 점을 제시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1998년 1월 13일 인수위에 대한 정통부 업무보고 첫 날부터 인수위원들은 PCS 특혜의혹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최명헌 간사를 비롯한 경제Ⅱ분과 위원들은 정통부 업무보고 시 “신규 사업자를 과다하게 허가해 과잉경쟁을 유발했고 결과적으로 국가자원의 낭비를 초래한 점은 묵과할 수 없다”면서 심사기준과 허가과정, 이에 따른 정치적 의혹을 파고들었다. 인수위원들은 사업자 선정기준 변경과 특정기업 사전 내정설, 정경유착설 등을 집중적으로 따졌다.
이에 대해 정통부는 심사평가 항목에 도덕성을 추가한 것은 대기업 경쟁력 집중을 막기 위한 정책적 결정이었으며, 사업자 선정과정은 공정했고 투명했다고 해명했다. 정통부는 사업자 수도 WTO체제에 대비해 `선(先) 국내경쟁, 후(後) 국제경쟁`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수위원들은 정통부의 이런 해명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며 사업자 선정 당시 심사위원 명단과 업체별 평가기준 및 점수 등에 관한 자료제출을 추가로 요청했다.
지대섭 당시 경제Ⅱ분과 위원(청호컴퓨터 회장, 15대 국회의원 역임, 현 서울마주협회장)의 증언.
“당시 PCS사업은 문민정부의 정경유착 결과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각종 언론에서도 특혜의혹을 많이 보도했어요, 특히 김영삼 대통령 차남 현철씨(여의도연구소 부소장 역임, 현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와 그의 측근이라는 안기부 고위간부 K씨, 그리고 한솔PCS 조동만 전 부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현철씨의 고교선배로 그와 가깝다고 알려진 이석채 전 정통부 장관 취임 후 갑자기 PCS사업자 선정방식을 전무배점방식으로 변경한 점도 특혜의혹의 배경이었습니다.”
실제 문민정부는 지난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T텔레콤)을 민영화된 데 이어 신세기통신을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했으며 1996년에는 국제전화사업, PCS 사업, CT-2 사업, TRS 사업 등 27개 사업자를 신규로 허용했다. 또 1997년 시내전화와 시외전화 사업 등에서 8개 사업자를 추가로 선정해 사업자 결정과정을 둘러싸고 특혜시비와 중복·과잉투자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앞서 경상현 장관(현 KAIST 겸직교수)은 PCS사업자 선정기준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이를 1995년 12월 15일 발표했다. 하지만 4일이 지난 12월 18일 오전 김영삼 대통령이 “통신 사업자를 또뽑기로 결정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대노했다. 이어 12월 21일 경 장관은 전격 경질됐고 이석채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 장관으로 발탁됐다.
한이헌 당시 청와대경제수석(현 한국디지털고등학교장)의 회고.
“경상현 장관 경질 이유는 PCS사업자 선정기준 때문이었습니다. 경 장관은 사전에 그런 방침을 청와대에 보고했어요. 하지만 인사권자는 대통령입니다.”
PCS 특혜의혹의 배후로 지목된 현철씨는 김영삼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었다. 현철씨는 `소통령`으로 불리며 장·차관 인사에 개입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비난을 받았다. 김 대통령은 현철씨가 불법정치 자금을 받는 바람에 대국민 사과담화문을 발표했고 결국 재임 중에 아들을 구속했다. 현철씨는 김대중 정부시절 사면 복권됐으나 2004년 한솔그룹 조동만 전 부회장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 20억원을 받은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이후 그는 국회 진출을 모색했지만 번번이 좌절했다.
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국회의장 역임, 현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의 증언.
“청와대 비서실장 재임 시 시중에 현철씨에 대한 여론이 너무 안 좋아 그런 내용을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현철씨를 불러 크게 야단을 쳤다고 해요. 그러자 현철씨가 내게 전화해 억울하다는 식으로 `제가 뭘 잘못했느냐`고 해요. 그래서 `그건 대통령께 직접 들어보라`고 했어요.”
인수위와 정통부는 PCS 사업허가를 놓고 뚜렷한 시각 차이를 보였다.
정통부에서 인수위로 파견 나온 이교용 전문위원(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우취협회장)과 강문석 행정관(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사장)은 PCS사업자 선정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했다고 인수위에 보고했다. 하지만 경제Ⅱ분과 위원들은 이런 보고나 해명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대섭 인수위원의 계속된 회고.
“인수위의 PCS 특혜의혹 제기에 대해 정통부는 나름대로 해명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특혜가 없이 공정하게 사업자를 선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합리화한 것이라는 게 인수위 측의 시각이었습니다.”
1월 23일.
인수위는 이종찬 위원장 주재로 전체회의를 열고 PCS 특혜의혹 처리 문제를 종합 검토했다. 이날 회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회의 후 이교용 전문위원과 강문석 행정관은 PCS 특혜의혹 비리와 관련한 업무에서 배제됐다. 정통부 입장을 대변하는 두 사람에 대한 인수위 측의 불신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이교용 당시 전문위원의 기억.
“인수위 전체회의에서 최명헌 간사가 `인수위에 파견 나온 부처 국장 중 해당 부처와 내통하고 전화로 정보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인수위에서 내보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어요. 알고 보니 그게 저를 지칭하는 발언이었어요. 제가 PCS사업자 선전과정에 의혹이 없고 공정하게 선정했다고 계속 보고하자 저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PCS와 관련한 업무에서 완전 배제하더군요. 심경이 참담했어요.”
강문석 행정관의 말.
“전체회의에서 이종찬 위원장조차 `왜 자료를 공개하지 않느냐`고 질책하더군요. 당시 전무배점방식이 문제였는데 자료를 공개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보고했더니 즉각 업무라인에서 빼더군요.
경제Ⅱ분과는 PCS의혹에 관한 업무는 국민회의 측에서 나온 김봉기 전문위원(한국정보문화센터 소장 역임, 현 문재인 대선후보 국민특보)이 담당하게 했다. 이후 PCS 특혜의혹은 감사원 특별감사로 이어졌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