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장비업체 해외 진출이 글로벌기업의 벤더파이낸싱(V.F, 프로젝트파이낸싱) 장벽에 부딪혔다. V.F는 당장 구매력이 없는 회사가 장비 판매사에서 자금을 대출받은 뒤 장비를 사고 이를 장기간에 걸쳐 상환하는 제도다. 에릭슨, 화웨이, 시스코 등 글로벌기업은 예외 없이 이 방식을 활용해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 국가에 진출한다. 진입장벽을 낮추고 높은 이자로 추가 이득도 볼 수 있다. 우리 기업은 대규모 자본이 없어 이 제도를 쉽게 도입하지 못한다.
무선통신 솔루션, 스위치, 광가입자망(PON), 교환기 등을 개발하는 국내 통신장비기업들은 최근 해외 수주전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개발도상국 등이 계약조건으로 자금 대출을 요구하는 예가 늘었기 때문이다.
PON 장비를 생산하는 중소업체 A사는 최근 동남아 진출을 모색하다 포기했다. 지역 통신사가 대출을 통한 공급 등 사실상 장비 무상공급을 요구한 탓이 컸다. A사 관계자는 “중국, 유럽, 북미에 위치한 글로벌 통신장비회사들이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개발도상국 기간망사업을 휩쓴다”며 “현금을 주고 통신장비를 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분위기가 현지에 만연하다”고 말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한 대기업은 지난 상반기 북미와 동남아 지역에 계열사 무선장비를 수출하려다 제동이 걸렸다. 거래업체가 V.F를 조건으로 내세워 무역보험공사와 수출입은행에 보증과 자금대출을 요청했지만 “현지 업체 신용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장지영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 부회장은 “글로벌업체들이 해외 거대 기간망사업에 V.F 방식을 적극 활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소규모 프로젝트도 대출을 요구하는 예가 크게 늘었다”면서 “자금 동원력이 없는 대부분 국내 업체들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이 누적되자 정부 차원에서 수출을 지원해 달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지난달 지식경제부가 진행한 통신장비 업계 간담회에선 “정부 보증 아래 파이낸싱 자금을 보조해 달라”는 업계 의견이 나왔다. 지경부 관계자는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관계기관 대출 기준을 조정하는 등 가능한 방법들을 검토 중”이라며 “연내에 통신장비 수출 지원을 위한 계획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