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와 근로자, 기업 구성원 모두는 자신의 회사가 영속하길 바란다.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 발전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변화에 적응 못하면 도태되는 게 기업 생태계다.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기업 수명을 조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935년 90년에서 1955년에는 45년으로, 1970년에는 30년으로 줄었다. 1995년에는 22년, 2005년에는 15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세계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이에 기업 운명도 요동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 300년 이상을 이어온 기업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 및 화학 전문 회사 `머크`다. 작은 약국에서 출발한 머크는 344년 동안 전통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지켜왔다. 화폐 개혁만 다섯 차례,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창업주의 가문이 13대째 회사를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 100대 그룹 평균 역사가 49.2년인 점을 감안하면 머크 300년 역사는 새삼 실감난다.
머크는 어떻게 영속성을 유지했을까. 답을 듣기 위해 머크 가문을 대표하는 프랭크 스탄겐 베르그 하버캄 머크 파트너 위원회 회장을 만났다. 가족 기업이 적지 않고 50년을 넘어 앞으로 100년을 내다봐야 할 국내 기업 현실에 머크는 지속 성장 모델에 대한 교과서 같은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이야기를 담기에는 한정된 공간이지만 머크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가족`이 아닌 `기업`이 우선이란 점이다.
- 머크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668년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가 약국을 인수하면서부터다. 100년 넘게 대를 이어가며 약국을 운영하다 1827년 하인리히 엠마뉴엘 머크가 알카로이드, 식물 추출물, 기타 화학 제품의 양산에 뛰어들었다. 프레데릭이 머크 가문의 창업을 이끈 창업주였다면, 엠마뉴엘은 머크를 근대적 기업의 반열로 끌어올린 분이다.
- `불멸의 기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화학 회사`. 머크에 따라 붙는 수식어다. 모두가 장수 비결을 궁금해 한다.
▲머크가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가족 사이에 일종의 계약이 있다. 가족들이 지분을 팔고 나가는 것보다 배당을 받는 게 더 유리하도록 했다. 가족 지분도 가족 내에서만 팔 수 있다. 머크 가족들을 오랜 시간동안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이유다.
둘째, 회사 경영에 관여할 대표를 뽑는 방식에 있다. 어떤 사람이 특정 계보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가족을 대표해야 한다는 식이 아니다. 머크 사람들은 오로지 능력이 있는 사람,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가족의 대표로 내세웠다.
셋째, 젊은 세대가 일찌감치 가문의 사업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한 점이다. 예를 들어 머크가의 아이들은 15~20세, 20~25세처럼 연령에 맞춰 회사의 전반을 알 수 있도록 수업을 듣는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가문의 사업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머크가는 단지 기다리면서 배당만 챙겨가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 가족이 경영을 해오다 1930년대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인재가 필요해서다. 머크는 제약 뿐 아니라 화학 사업도 한다. 제품 수만 해도 수 만개다. 세계 각국에 판매한다. 가족 구성원만으로 소화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복합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 가족 기업에서 소유와 경영은 일가가 맡으려는 경향이 크다.
▲우리는 가치 지향적이다. 가문이 아닌 회사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가족의 이해관계가 우선이 아니다. 아무리 명문가라 하더라도 가장 우수한 경영자라는 보장은 없다. 기업을 소유했다고 해서 경영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가족이라고 해서 특혜를 주는 것, 그리고 가족이라고 경영을 맡기는 것 심각한 문제로 본다. 머크의 경우 가족이라도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 단순히 가족이라고 해서, 가문 사람이라고 해서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업, 회사의 성장을 위해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는 열린 태도가 중요하다.
- 기업을 우선한다는 말, 구체적인 의미를 듣고 싶다.
▲다른 문제들보다 가장 앞서 회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창업자 가족이라도 아이들은 평범한 학교와 직업을 갖고 생활하며 현재 머크에 근무하는 이는 없다. 학교 선생님, 변호사, 농부, 엔지니어, 치과의사, 주부 등 각자의 일에 충실할 뿐이다. 창업가 가족은 명품이나 비행기 등을 소유하지 않는다. 회사가 번 돈을 그대로 회사에 두기 때문이다. 회사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 다음에 개인사에 관심을 가졌고 가족들은 수익을 회사에 재투자했다. 배당의 많은 부분을 회사에 내놨다. 일례로 머크가 세로노(생명과학 업체)를 인수했을 때 가족들이 인수 자금을 냈다. 그만큼 회사를 중시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성공비결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분리한 것은 아니다. 머크의 가족들은 투자가가 아닌 기업가로써 활동하며 기업경영이 전략적, 경제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살피고, 매주 경영진으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는다. 따라서 머크의 경영과 소유가 완전히 분리됐다고 할 수 없다. 분기별 실적도 살피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생각한다. 즉 단기간 실적이나 이익보다는 다음 세대가 물려받는 사업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사업을 지속하면서 기업가로 활동한다.
여기서 잠시 머크의 지배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쌓은 가문과 기업의 이원적 구조다. 머크(Merck KGaA)의 지분 70%는 모기업 `이머크(E.Merk KG)`에 있다. 이머크는 다름 아닌 머크가 사람들이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가족 130명이 공동으로 지분을 보유 중이다. 가문을 대표하는 법인체인 셈이다.
그런데 머크의 경영은 `비(非)머크` 사람들이 이끈다. 외부의 유능한 인재에 경영을 맡긴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유`와 `경영`의 완전한 분리다.
하지만 단순한 분리를 뛰어 넘는다. 회사 운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면서도, 경영에 대한 감독은 가족의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머크 내에는 가족 5명과 외부 사람 4명으로 구성하는 `파트너 위원회`가 있다. 이들은 머크를 움직이는 최고경영위원회 멤버들에 대한 선임·해임 권을 갖는다. 최고경영위원들은 기업 경영과 함께 이머크에서 결정한 전략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소유와 경영을 나누면서도 기업에 대한 가문의 통제권이 유지되는 것이다.
단, 파트너 위원회는 일상적인 경영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관리·감독을 통해 기업 경영이 전략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뤄졌는지 살핀다.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한 논의도 함께 한다. 머크의 가족이 기업가로 활동할 수 있는 중요 통로인 셈이다. 하버캄 회장은 바로 머크 비즈니스를 관리·감독하는 파트너 위원회 회장이다.
- 머크 가문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회사 홈페이지나 논문만 보면 머크 지배구조가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아주 단순하다. 회사의 주요 결정 사항은 파트너 위원회에서 승인되면 바로 집행할 수 있다. 회사 경영을 총괄하는 전문 경영인이 상대해야 할 머크 가문 사람은 5명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오랫동안 머크라는 회사의 비즈니스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런 구조는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줄이고 빠른 결정을 할 수 있게 한다. 2010년 밀리포아(미국 의학 실험 장비 업체)를 한 해 매출에 가까운 70억 달러를 들여 인수했을 때 머크가를 포함한 주주의 동의를 얻는 데 걸린 시간은 4주에 불과 했다. 상당수 기업들이 좋은 기회를 보고도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해 기회를 놓치지만 머크는 대주주인 머크가와 전문 경영진이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빨리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도 새로운 사업 포트폴리오의 방향을 꾸준히 논의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30여 명 머크 일가는 각각 5% 이내의 지분을 갖고 있다. 확실한 대주주가 없다 보니 가족 간에 이견이 적지 않고 조율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각자 의견이 있기 마련이다. 이견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대화를 거듭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해 서로 합의점을 도출한다. 지혜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통 분모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큰 이견들은 없었다.
-기업 경영에서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머크가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검토하고 내린다. 원칙은 간단하다. `우리가 힘을 쏟을 분야는 혁신적인 사업이지 범용재(commodity)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복제약은 이미 범용재가 됐다. 범용재의 경쟁력은 결국 가격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가격, 가격, 가격 그리고 또 가격을 외쳐야 한다. 대규모 투자를 해서 생산 규모를 늘린다면 시장을 수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크 분야가 아니다. 우리는 혁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크는 의료, 화학 외 다른 산업 분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머크가 생각하는 혁신은 무엇인가.
▲머크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꿀 경우에도 머크가 잘 아는 분야에서 한다. 다시 말해 머크가 가진 제약과 화학이라는 두 분야의 외연을 계속 확장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내일 당장 자동차를 만드는 식으로 사업하지 않는다. 혁신이란 게 꼭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업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약과 화학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축적된 전문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분야에서도 계속 혁신할 수 있다. 외부인들이 우리 직원들을 만나면 전문성이 높아서 놀란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혁신의 핵심은 사람이다. 그리고 머크는 직원들이 혁신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준다. 규제된 상황에서는 창의성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창의성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경영자로서의 역할, 또 조직으로서 회사의 역할은 직원들의 자유를 잘 관리하는 일이다.
혁신이 매년 이뤄지는 게 아니고, 때로는 10년을 연구해도 새로운 발견을 못 할 때가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직원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게 중요하다.
겉보기에 머크는 제약과 화학이라는 두 축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사업 모델이 많이 변했다. 우리가 인수한 밀리포아의 경우 각종 실험 장비를 파는 동시에, 바이오 의약품 제조기기 분야에서 선두다.
우리도 늘 다음 사업 모델에 대해 고민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사업을 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제약과 화학을 오래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성공하리란 생각도 안 한다. 중요한 것은 고객과 시장의 요구를 끊임없이 반영하는 것이다. 똑같이 약을 만드는 일이라도 고객과 시장에 따라 사업 모델도 늘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1948년 독일 도르스텐 태생
~1977년 프리버그대학 부교수
1978~1977 코메르츠은행, 베어링브라더스, 런던함브로스
1998~2001 파트너 위원회 부회장
2002~ 파트너 위원회 회장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