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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패미콤 출시 당시 신문에 낸 광고 모습

1983년은 정부가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 `정보산업 육성계획`을 대대적으로 추진한 시기다. 정부는 육성 계획의 일환으로 전국 학교 교육현장에 국산 8비트 컴퓨터 5000대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계획만큼 순탄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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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SPC-1000'

앞서 1982년 PC 보급사업에 착수했지만 당시 8비트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자금 부족 등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1983년 교육용 컴퓨터를 새로 개발할 민간업체를 선정해 다시 추진하게 됐다. 하지만 이 또한 가격 문제로 애초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정부는 당시 한 대당 가격을 24만원으로 책정하고 5개 민간 업체가 1000대씩 생산하도록 했다. 반면 그 가격을 맞추기 어려웠던 업체들은 두 배 이상을 들여 컴퓨터를 만들었다.

교육용 PC를 공급 받은 학교에서조차도 이 컴퓨터를 활용할 방법이 없었다. 프린터 등을 설치하면 추가비용이 배 이상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육용 PC의 활용에는 사실상 실패했지만 이러한 PC 보급 사업은 국내 상업용 PC 시장을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5개 민간 업체들이 교육용으로 개발한 PC를 민간시장을 겨냥해 제대로 된 PC로 재탄생시켰다.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TG삼보컴퓨터)의 트라이젬30,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SPC-1000`, 금성의 `금성패미콤`, 한국상역의 `스폿라이트1`, 동양나이론의 `하이콤8` 등이 그 당시 출시된 상용 PC 제품이다.

정부의 이 같은 교육용 PC 보급사업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자 `졸속 정책`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삼보전자엔지니어링, 삼성반도체통신 등의 국산 업체들이 컴퓨터 산업에 뛰어들면서 정보화 시대를 앞당길 수 있었다. 정책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1983년은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도 정부 주도로 야심차게 진행됐다. 당시 정부의 위탁과제로 개발을 맡았던 곳은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개발센터 제1그룹이었다. 제1그룹은 1979년 말께에 마무리된 한국과학기술원의 `정보산업 토착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란 프로젝트에 포함된 `워드80`을 바탕으로 1983년 국산 첫 상용 워드프로세서 `명필`을 탄생시켰다.

개발 과정에서 한국과학기술원이 1982년에 완료한 `컴퓨터 관련 표준안 제정` 작업이 명필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즉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글코드 및 키보드 자판의 표준이 그 때 확정된 것이다. 그 자판 배열로 실제 손쉽게 활용 가능한지를 증명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정왕호 연구원이 상용 제품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고려시스템산업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과학기술원과 공동으로 상용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것이다. 사실상 개발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주도하고, 고려시스템산업에서 명필을 상품화하고 이를 대량 생산해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고려시스템산업은 부평공장에서 연간 3000대 규모의 생산설비를 갖춰 양산을 시작했다. 1982년까지 우리나라의 PC 누적 총보급대수가 1000대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당시 생산규모는 엄청났던 셈이다.

명필은 워드프로세서 기능만을 위주로 사용하는 사무자동화(OA) 기기였다. 소프트웨어(SW)만이 아닌 하드웨어와 입출력기기까지를 포함한 시스템이었다. 고급 그래픽 기능을 가진 프린터가 포함돼 있어 당시 생산 초기의 포니 자동차 값의 반을 훌쩍 넘는 고가였다. 하지만 출시되자마자 중견기업에서 앞다퉈 도입했고, 정부 기관에서도 적극 활용했다.

명필에 이어 워드프로세서 제품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 제품들은 거의 모두 전용 하드웨어를 사용하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성숙하지 않은 시장 환경에서 과다출혈 경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하드웨어 독립적인 워드프로세서 SW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금성소프트웨어(현 LG CNS)가 행정전산망 PC용으로 내놓은 `하나`가 개발되던 1987년 즈음이다. `명필`은 `하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국내 대표 워드프로세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후 도래한 IBM PC 호환 기종의 확산 및 동일 하드웨어 환경에서의 한글과컴퓨터의 `한글`로 대표되는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갖춘 SW 등장으로 전용 워드프로세서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게다가 `한글`은 등장 초기에 무상으로 배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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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첫 상용 워드프로세서 `명필` 개발을 주도했던 이기식 공학박사. 당시 그는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개발센터 1그룹장이었다.

◆ 이기식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개발센터 1그룹장(현 NIPA 인도네시아 파견 IT자문관)

우리나라의 첫 상용 워드프로세서 `명필` 개발을 주도했던 이기식 박사는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개발센터 1그룹장이었다. 그는 아직도 명필을 개발했던 과정들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명필의 최초 고객은 청와대 경제비서관실과 안전기획부, 체신부 등이었으며, 당시 국무회의나 대통령 보고 문건은 모두 명필로 작성했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고 회상한다.

이 박사는 “명필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차트로 만들거나 `공판`이라는 간이인쇄과정을 거쳐야만 했다”면서 “명필의 도입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사무자동화(OA)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말했다.

`명필`이 탄생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명필은 소프트웨어만이 아닌 하드웨어와 입출력기기까지 포함한 시스템이다.

`보급형`이라는 조건을 총족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비용이 저렴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탑재할 하드웨어 값만 수백만원이었다. 이 박사는 궁리 끝에 일본 후지쯔에서 개발한 일본의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오아시스`를 참조모델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아시스 기종의 국내 반입이 여의치 못해 개발팀이 그 실물을 본 것은 명필 개발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결국 `보급형 PC`보다 상위인 `Z-80`이란 CPU를 적용한 독자 설계 모델을 채택하게 됐고, 생산에 착수한 이후에도 급변하는 기술환경에 따라 지속적인 기능개선이 이뤄져야만 했다. 업그레이드를 위한 애프터서비스 제공으로, 명필을 출시한 회사는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명필이 국내 첫 상용 워드프로세스기는 하지만 SW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당시엔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하고 SW를 사용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명필 역시 전용 하드웨어 환경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

명필은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지난 1989년 7월 25일 천안 독립기념관 내 대한민국관(전시품목번호 041-560-0291)에 전시됐다.

이 박사는 “아들이 수학여행 때 독립기념관에 진열된 것을 보고 와서 알려줬는데, 개발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뿌듯했다”고 털어놨다.

명필의 등장에 뒤이어 워드프로세서 제품이 우후죽순 등장했지만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제품이 전용 하드웨어를 사용하는 모델들이었고,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갖춘 소프트웨어의 등장으로 전용 워드프로세서는 더 이상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에 `한글`은 출시 초기부터 무상으로 사용 가능한 SW로 배포되면서 국내 OA 소프트웨어 시장환경을 바꿔 놓았다.

그는 지난 30년간 국내 IT 산업의 발전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권의 변화에 따라 뒤바뀌는 제반 기술관련 정책 기조와 담당부처의 흥망성쇠 등을 가장 안타깝게 여겼다.

이 박사는 “지난 우리나라의 정보화 시대를 이끌어온 수많은 선배들의 지혜를 보탤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진정한 SW강국으로 거듭나갈 바란다”면서 “무엇보다도 IT 산업은 정권과는 무관하게 장기적으로 추진되는 정책이 펼쳐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기식 박사는 현재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의 월드프렌드코리아(WFK) 사업의 일환으로 인도네시아정부(산업부)의 자문관으로 일하고 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