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3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은 국가에 필요한 고급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고, 연구중심 대학의 모델을 제공하기 위해 1971년 서울 홍릉캠퍼스에 처음 설립됐다.

당시는 경제개발 계획에 따른 산업화를 뒷받침할 고급 과학기술인력 양성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고급 두뇌의 해외 유출을 막아야겠다는 시대적 배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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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치러진 KAIST 학사과정 첫 입학식. 당시에는 한국과학기술대학(KIT)로 나눠져 운영되고 있었다.

불혹을 넘긴 KAIST는 현재 산업에 필요한 과학기술 이론과 응용력을 갖춘 고급 과학기술인력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또 국가 차원의 중장기 연구개발과 국가과학기술 저력을 높이기 위한 기초 및 응용연구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석·박사 과정만 있었던 KAIST에 학사과정 신설을 결정한 때는 1984년 말이었다. 당시 이공계 전문인력을 폭넓게 양성해야 한다는 과학기술계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학사과정 첫 입학식이 있었던 1986년의 과학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15년 전 KAIST가 태동한 시점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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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설립을 처음 제안했던 정근모 한국전력공사 고문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KAIST 설립 제안=KAIST 설립을 처음 제안했던 인물은 정근모 한국전력공사 고문(전 과학기술처 장관)이다. 미국 뉴욕공과대 부교수로 재직 중이던 정 고문은 1969년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계획서를 작성해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전달했다. 이 계획서는 이듬해 4월 박정희 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경제동향보고회의에 보고됐다.

정 고문은 전자신문 기획시리즈 `결단의 순간들(2005년 1월)`에서 “당시 국립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KAIST가 잉태했다”고 회고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KAIST 설립은 물 흐르듯 했다. 1971년 2월 16일 발족식이 열렸고, 초대 원장에는 원자력연구원장을 역임한 이상수 박사, 초대 부원장에는 당시 미국 뉴욕공과대 플라즈마 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정 고문이 선임됐다.

정 고문은 당시 최첨단 플라즈마 발생장치를 개발하고 연구하던 그야말로 `잘나가던` 과학자였다. 미국과학재단과 원자력위원회의 전폭적인 연구지원을 바탕으로 독창적 연구업적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귀국한 것을 두고 국내 과학계는 당시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KAIST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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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KAIST 서울 홍릉캠퍼스 모습

◇기술집약형 산업 구조가 고급 인력 수요 초래=KAIST 발전은 설립 5개년 사업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됐다. 1976년 1단계 사업이 완료된 시점에서 KAIST 석사과정은 안정권에 진입했다.

2단계 사업이 시작된 1977년은 우리나라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해로, 정부는 당시 중점 과제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에 집중했다.

그때부터 산업 전반에서는 고급 과학기술자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1975년 표준연구소를 시작으로 1976년과 1977년 사이에 한국화학연구소,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등 정부출연연구소가 대거 설립된 것도 연구원 수요를 촉발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성장한 산업 및 연구계의 이공계 인력부족현상은 결국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6년 KAIST 학사과정 신설로 이어졌다고 해석된다.

학사과정 개설은 1984년 12월 고급과학기술인력 대량 배출을 위해 설립된 한국과학기술대학(KIT)에서 준비했다. 당시 KIT와 KAIST는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

KIT는 이후 1985년 학사과정 모집을 마치고 1986년 3월 28일 제1회 입학식을 열었으며, 1989년 7월 4일 KAIST와 통합됐다. KIT 설립으로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과학영재교육기관을 가지게 됐으며 KAIST의 석·박사 과정과 연계, 20대 박사 배출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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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연구원들의 연구 장면

◇전두환 전 대통령 지시로 학사설립 속도=학사과정 설립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1982년 당시 공업고등학교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이 노동부 장관에게 `첨단기술 분야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시초였다.

이는 한독기술협력사업계획에 따라 서독정부가 제공하기로 했던 900만마르크(약 45억원)의 원조를 사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전 대통령 역시 전임 박 대통령이 한국과학원을 설립했던 것처럼 자신도 과학기술인재 양성 기관의 설립자가 되고 싶었던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KIT 설립은 빠르게 진행돼 1983년 대학설립추진단이 구성되고, 그해 7월 26일 학교법인 한국산업기술학원 창립총회가 열렸다.

학교법인 및 대학설립계획이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뒤 8월 13일 곽윤근 박사가 설립추진단장에 임명됐으며, 이듬해 1월에는 KIT 설립계획안이 문교부 승인을 받았다. 1984년 당시 영재교육과정 설치를 위한 예산은 8억6300만원이었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내부적 갈등도 많았지만 결국 KIT와 KAIST는 대통령령에 의해 `과학기술원 학사규정 개정령`이 공표돼 1989년 7월 4일 조직과 운영이 통합됐고, 대덕시대를 개막했다.

KAIST는 이후 지난 2009년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와 통합했으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력의 산실로 수많은 학자와 기업인 및 기술관료를 배출하는 과학인재의 요람으로 성장해 왔다.

◆ 곽윤근 한국과학기술대학 설립추진단장(현 KAIST 명예교수)

곽윤근 KAIST 명예교수는 1983년 4월부터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현 KAIST 학사부) 설립 업무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대학 설립 이사회가 1983년 7월 발족한 후, 8월 대학설립추진단장을 맡았고, 대학 조직이 구성된 후에는 교무처장으로서 학사과정 설립 및 운영에 가장 깊이 있게 관여했다. 다음은 곽윤근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KAIST 학사과정 설립 당시 어려웠던 점은.

▲명문대학이 되기 위해선 우수한 교수와 학생, 행정 및 재정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KIT 첫 입학식이 있었던 1986년에는 문교부 국비 장학생으로 선진국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이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려는 인재들이 많아 교수 초빙의 폭이 넓었습니다. 교수 초빙에 어려움은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 우수학생 유치 방안은.

▲첫 입학생이 그 대학의 학생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요. 세 가지 방법으로 진행했습니다. 우선 무학년 무학과제를 실시해 1~2년 후에 본인의 적성을 찾아 학과를 정하도록 했고, 과를 옮기는 것도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이 제도는 사실 10년 후 일반 대학에서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학점 인정 시험제도를 활성화해 조기 졸업을 유도했습니다.

두 번째는 학생선발을 학력고사에 의존하지 않고 대학 자체에서 출제한 입학고사 성적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때는 전기 대학에 합격하면 후기 대학에는 지원할 수 없게 돼 있었는데 한국과학기술원법에 근거해 KAIST에 합격해도 타 대학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부담 없이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죠.

-학생 유치과정에서 특히 힘들었던 점은.

▲강의가 없었던 60명의 교수들이 홍보책자를 들고 고등학교를 찾아다녔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곳보다는 외판원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죠. 그런데 첫 입학고사를 치르기 사흘 전인 1985년 9월 24일 모일간지에 `과기대 첫 모집서 3.3 대 1`이라는 기사가 나오더군요.

또 1986년 1월 3일자에도 `과기대 특차전형 문제 많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KIT와 서울대에 2중 합격해 10명만 등록했다는 내용을 보고 첫 입학생을 성공적으로 선발했다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KAIST 학사과정 개설 후 에피소드가 있다면.

▲30년 전 과학기술 분야는 남자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남자고등학교만 방문했었죠. 그런데 당시 학장을 맡았던 최순달 박사가 우수 교수 초빙을 위해 미국 칼테크 총장을 만났는데, `여학생 유치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최 박사가 `우리 대학은 여학생을 받지 않는다`고 답하자, 그가 `우수한 남학생이 오게 하려면 우수한 여학생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KAIST는 여학생 유치에 나서기 시작했고, 당시 남학생용으로 지었던 기숙사를 여학생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학사과정 첫 입학식에 노벨상 수상자인 돈 글러저 박사를 초청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해 10분간 축사를 맡겼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었습니다. 당시 국민소득 1만 5000달러 국가로서는 무모했죠. 그런데 첫 입학식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축사를 한 것은 당시 입학생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표] KAIST 연혁

1971. 2. 16 한국과학원(KAIS) 설립(서울 홍릉캠퍼스)

1973. 3. 제1회 석사과정 입학식

1975. 8.20 제1회 석사학위 수여식

1975. 9. 제1회 박사과정 입학식

1978. 8. 19 제1회 박사학위 수여식

1981. 1. 5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 KIST와 통합

1984. 12. 27 한국과학기술대학(KIT) 설립, 학사과정 신설

1986. 3. 28 한국과학기술대학 제1회 입학식

1989. 6. 12 KIST와 분리

1989. 7. 4 한국과학기술대학과 통합(대덕캠퍼스 이전)

1990. 2. 17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

1996. 10. 1 부설 고등과학원 설치

2003. 7. 12 기관장 명칭을 `원장`에서 `총장`으로 변경

2004. 5. 4 부설 나노종합팹센터 설치


2006. 7. 14 서남표 제 13대 KAIST 총장 취임

2009. 3. 1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 통합


정재훈기자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