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는 2008년 봄 중소기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금융상품 사건이다. 4년이 지난 현재까지 구제 신청한 기업 상당수가 조치를 받지 못했다. 여전히 지지부진한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키코(KIKO:Knock In, Knock Out)는 금융권에서 판매한 파생상품 명칭이다. 명목상은 환위험 상품이다. 기업과 은행이 환율 상단과 하단을 정해 놓고 환율이 정해진 기간 내 하단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한 상단에 해당하는 환율로 달러화를 계약금액만큼 팔 수 있도록 했다.
수수료가 선물환에 비해 저렴해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환율 변동이다. 환율이 하한 이하로 내려가면 계약이 무효가 돼 상품에 가입한 기업은 막대한 환손실을 본다. 상품 가입 시 상한 이상으로 올라가면 약정 금액의 두 배 이상을 팔아야 하는 옵션을 붙였을 때 더 큰 손해를 봤다. 약정액에 추가로 약정액만큼 오른 환율로 매입해 은행에 매도해야 했다. 당시 미국발 금융위기 전초로 환율이 출렁이면서 은행과 기업이 정한 상단과 하단을 이탈했다. 기업 피해로 이어지고 소송까지 가게 됐다. 문제는 피해를 본 곳이 워낙 많다는 점. 2009년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키코상품에 가입한 기업의 손실규모가 무려 3조3000억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72.7%인 2조1159억원이 중소기업 손실에 해당했다.
당시 이슈는 은행이 중소기업에 위험성 등을 충분히 고지했는지다. 적격성 심사도 마찬가지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많자, 중소기업 대표 단체인 중소기업중앙회가 키코로 피해본 중소기업을 대표해 대응에 나섰다. 당시 금융감독당국이 은행의 손실보상 요구에 대해 개입이 어렵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중기중앙회는 업계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건의서를 정부 등 각계에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논란이 일자 금융감독원은 키코상품 점검에 나섰다. 주요 시중은행 모두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점검 내용은 `계약 시 기업 적합성 심사가 적정했는지` `계약기업에 키코상품 위험 고지가 적절했는지` `손실 이전거래로 키코 계약을 해지했는지` `키코 거래를 위해 신용위험에도 한도 초과를 부여했는지` `여신을 미끼로 키코상품 가입을 강요했는지` `키코 신규 거래 시 계약체결이 적정했는지` 등이다. 당시 이진복 의원(현 새누리당)은 부문별 키코 계약과정에서 은행의 부적절성을 발견했다며 그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파장이 확대되자 정부와 기업은 피해 기업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중소기업청은 파생금융상품인 키코에 가입했다가 환 손실을 본 중소기업에 300억원을 긴급 지원했다. 회생특례자금을 조성하고 키코 손실기업에 업체당 연간 10억원 이내로 지원한다고 밝혔다. 대출기간은 거치기간 1년을 포함해 3년이었다. 중기청은 또 키코에 가입한 중소기업 중 유동성에 문제가 있는 기업에 정책자금을 만기연장하거나 상환을 유예해 줬다. 시중은행에 키코 손실액을 기업 평가항목 산정 때 분리해 줄 것과 중소기업 대출이 급격히 감소하지 않도록 일선창구의 지도·감독 강화도 요청했다.
금융위원회도 키코 손실로 자본잠식 상태인 상장법인에 이의신청 기회를 부여했다. 증권선물거래소가 회사경영 전반에 대한 실질심사를 하도록 해 상장폐지를 유보하도록 했다. 당시 규정대로라면 최근 사업연도 말 기준 자본잠식률이 50% 이상이면 상장폐지되고, 50% 이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됐다. 외환파생상품으로 자본잠식 상태인 기업에 이의신청 기회도 주지 않고 상장폐지토록 한 규정은 지나치다는 지적 때문이다.
기업도 지원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키코 피해로 어려움을 겪던 벤처기업 T사를 도왔다. `직접 사급` 방식으로 최종 구매기업인 삼성전자가 2차 협력사로부터 부품·소재를 구입한 뒤 이를 1차 협력사인 T사에 공급해 임가공하는 조달 방식이다. 2차 부품 협력사가 최종 구매자와 직거래해, 1차 협력사가 유동성 위기를 겪더라도 납품 대금을 떼일 염려가 없도록 했다.
사건이 개선되지 않자, 키코 피해 기업 100여개사는 은행들을 상대로 무더기 소송을 제기했다. 환율이 지정한 범위를 웃돌 경우(Knock In) 상품 가입자 손해는 무한대가 되지만 환율이 지정 범위 아래로 떨어질 경우(Knock Out) 계약이 무효가 돼 가입자는 환 헤지 혜택을 못 받는 불공정한 약관이라는 것. 키코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냈다. 키코 상품을 판매할 때 위험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고 대출 연장 등을 볼모로 상품을 판매하는 등 은행의 불완전판매로 손실을 입은 데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병행했다. 소장에는 `키코상품 불완전성` `약관규제법이나 민법상 무효로 볼 만한 사유가 있음` `은행 때문에 손실이 발생한 부분 있음` `신청 기업의 피해가 급박하고 현저하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이에 대해 1심에서는 은행 측 보호의무 위반이 인정된 19개 기업에만 20∼50% 배상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에서도 `불공정 계약이 아니다`며 은행 손을 들어줬다. 다만 은행이 계약 위험성 설명의무를 다하지 않은 점에 대해 1심과 마찬가지로 일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키코 계약 구조는 환율 변동의 확률적 분포를 고려해 쌍방의 기대 이익이 대등하므로 시장 환율이 예상과 다르게 변동해 결과적으로 이익에 불균형이 생겼더라도 계약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계약과정에서 은행이 환헤지의 부적합성이나 옵션 수수료 등으로 기업을 속였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지난 2010년 2월에는 은행이 키코 계약에 따라 기업과 은행이 각각 얻게 될 풋옵션과 콜옵션 가격이 평균 2.5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옵션 가격이 같다고 속였다는 취지로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은행 사기 혐의를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은 고발된 11개 시중은행 임직원 90여명 전원을 무혐의 처분한 바 있다.
“은행은 환율 변동의 피해 가능성을 자세히 설명했어야 합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연구본부장은 4년 전 키코 사태에 대해 “상품 구조를 볼 때 은행이 환율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본부장은 “은행 역할에는 거래 중소기업의 리스크 관리가 어느 정도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며 “키코사태는 신의성실 원칙에 위배된다. 은행은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코상품 문제점도 적시했다. “상품 기본 구조를 보면 은행은 계약에 따라 환율이 상승하면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반면에 기업은 약정환율 밑으로 내려가면 계약 자체를 해지해야 합니다. 이 경우 기업은 이익을 챙길 수 없는 구조입니다.” 김 본부장은 이어 “은행이 상품을 팔 때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했는지, 즉 불완전판매 여부가 주요한 쟁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상품에 가입한 기업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는 약자 위치인 기업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물론 양비론적으로 접근하면 상품에 가입한 기업에 일차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과 거래에서 기업은 약자 위치입니다.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모든 책임을 중소기업에 돌리는 것은 적절치 못한 태도입니다.”
김 본부장은 “은행은 책임이 없었는지 그리고 관리감독을 하는 금융감독기관은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를 살펴보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기업이 키코상품을 가입했던 것도 은행들이 키코영업에 적극 나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은행과 장기거래를 해온 중소기업 쪽에서는 은행의 적극적인 영업활동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환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금융상품이 오히려 중소기업을 위험으로 몰고 갔습니다. 환헤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됐다는 점에서 엄청난 수업료를 지급한 셈입니다.”
그러나 김 본부장은 “수업료를 지불한 만큼 리스크 관리를 더 해야 하는데 문제는 키코사태 이후 중소기업이 환헤지 상품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키코사태 처리과정에서 은행이 보여준 행태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했다. 이어 “대외환경이 불확실할수록 사전에 리스크 관리를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다. 환율 변동 폭이 커질수록 환헤지의 중요성이 커지는 만큼 환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며 “금융권이나 금융당국은 중소기업들이 안심하고 환헤지 상품에 가입할 수 있는 금융상품 개발과 감독체계를 확립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m
김준배기자 j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