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2가동에 원효대로를 중심으로 한 집단 전자제품 상가가 형성됐다. 나진상가를 시작으로 선인상가, 터미널상가, 전자랜드, 전자타운 등이 이어 들어오면서 지금 용산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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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자상가가 있는 곳은 과거 용산 청과물 시장이 있던 자리다. 1983년 10월 용산 청과물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전하며 전기·전자제품 판매단지 및 관광버스 터미널 설립 계획이 마련됐다. 1984년 12월 서울특별시의 사업시행 기본 계획 방침이 확정되고 1985년 10월 도시계획사업 시행 허가로 본격적인 조성이 시작됐다.
1987년 용산전자상가 개장 이후에도 계속해서 건물이 들어섰다. 1988년 6월 용산전자상가 20개 동 가운데 18개 동의 공사를 완료하며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지금의 모습으로 단지 조성을 거의 마무리했다.
용산 전자상가의 총 공사기간은 1985년부터 1990년 6월까지였으나 1995년 12월까지 연장 진행됐다. 부지 0.08㎢, 건물 20개동 연면적 0.26㎢, 총 점포 수 약 8000개 규모다.
1987년 용산전자상가 개장 후 당시 전자제품의 중심이었던 청계천 세운상가 업체들이 용산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정부가 세운상가를 도심 부적격 업종으로 판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용산전자상가는 일본 대만에서 부품을 가져 와 조립한 뒤 값싸게 파는 PC가 주력 상품 이었다. 삼성과 LG 같은 브랜드 PC가 자리 잡기 이전에 용산전자상가의 조립PC로 국내 IT산업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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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사려면 용산전자상가로 가라는 말이 당연한 시기였다. 1988년만 해도 국내 PC 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1.12대꼴이었다.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구매 방법조차 모르는 일이 허다했다.
용산전자상가는 정보 교류의 장이자 실험실 같은 곳이었다. IT 프런티어를 꿈꾸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전자제품 가게를 돌며 싸고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를 수 있었다.
용산전자상가는 1990년 초 본격적인 전성기에 들어섰다. 당시 컴퓨터, PC통신, 인터넷으로 이어지던 컴퓨터 시장 붐은 용산전자상가의 호황을 일으켰다. 용산전자상가의 인기는 국내 컴퓨터 보급률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998년 100명당 컴퓨터 18대꼴로 PC 보급률이 급성장했다.
꾸준한 인기로 전자제품의 메카의 명성을 이어가던 용산전자상가는 2000년대로 접어들며 인터넷 쇼핑몰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용산에서 “인터넷에서는 가격이 이렇다”며 가격표를 내미는 소비자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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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자상가 가게들은 매장 임차료, 인건비 등을 포함해 가격을 매기는데 소비자는 더 싼 제품을 원하는 것이다. 결국 소비자는 냉정하게 비싸고 불편하다며 용산전자상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용산전자상가의 가게들도 인터넷 쇼핑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많은 업체들과 가격 경쟁을 치열하게 하다 보니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전 용산전자상가를 방문객이 가득 메우던 때의 성과는 없었다.
용산전자상가는 대형 브랜드 PC업체들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인터넷 쇼핑몰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한층 힘들어졌다. 대형 브랜드는 제조 기술도 있고 자체 유통망도 갖고 있으니 시장에서 싸울 방법이 없었다.
용산전자상가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강매 혹은 바가지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말하는 이른바 `용팔이`도 상가 번영의 발목을 잡았다. 용산전자상가는 정찰제가 없는 까닭에 이런 호객 행위 등으로 고객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
제품 사후 관리가 브랜드처럼 체계적이지 못한 것 또한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일부 상가에서 수리서비스 센터 등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미 대형 브랜드 PC업체들은 자체 수리서비스망도 유통망과 함께 전국에 보유하고 있었다.
IT 기기가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등으로 다양해지며 더 이상 PC 시장이 커지지 않은 것도 용산전자상가에는 악재였다. 스마트폰, 스마트패드는 시장이 커지고 조립PC, 카메라, MP3, 노트북 등 용산전자상가의 주력 제품 시장은 줄었다.
용산전자상가는 국내 전자제품 유통의 메카로 IT 강국으로 발전하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비록 오프라인 유통 시장이 침체기로 어려움을 겪은 용산전자상가지만 다시 옛 영광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용산은 2016년 말 완공을 목표로 국제업무지구 개발에 들어갔다. 용산역과 용산전자상가 부근에 초고층 빌딩을 비롯한 업무단지가 들어선다. 용산의 지형을 바꿀 이번 개발은 용산전자상가에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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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산 용산전자조합장
“대단했습니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용산을 찾았습니다.”
김영산 용산전자조합장은 개장 이후 용산전자상가의 전성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김 조합장은 용산 토박이다. 마포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그는 용산전자상가 개장 직후인 1988년부터 사업 터전을 꾸려왔다.
그가 말하는 용산전자상가 개장은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정책으로 용산에 전자유통 종합단지를 조성했지만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업체는 많지 않았다.
“처음 이주를 결정한 업체는 많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몇 개월간 임대료를 받지 않는 건물주도 많았습니다. 청과물 시장이었던 곳에 전자단지가 조성돼 처음부터 영향력이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점차 업체들이 호황을 누리며 상가 권리금까지 오르는 등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김 조합장은 용산전자상가가 대한민국 전자제품 유통의 중심으로 IT 발전에 기여한 것에 자부심을 내비쳤다.
“용산전자상가가 국내 최초 전자유통 단지는 아니지만 하나 둘씩 이주한 전자제품 유통 사업체가 모이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용산에 없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할 정도로 IT관련 모든 제품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용산전자상가가 국내 IT 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컴퓨터 보급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용산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용산전자상가 개장 직후 1988년 국내 컴퓨터 보급률은 국민 100명당 1.12대꼴이었다. 컴퓨터 보급은 그때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 1998년 국민 100명당 18대로 급증했다.
그는 국내 컴퓨터 보급률이 폭발적으로 오를 당시 용산전자상가의 모습을 회상하며 “용산전자상가에 있는 업체는 하루에 적어도 조립PC 10대 이상 팔았습니다. 컴퓨터의 인기로 고객들이 용산에 몰려 셔터를 내리고 밥을 먹을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집채만 한 컴퓨터가 점점 작아지며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컴퓨터 운용체계가 도스에서 마우스를 사용하는 윈도 시리즈로 진화한 것도 PC 보급에 불을 붙인 혁신이었다. 용산전자상가의 컴퓨터 판매는 386, 486, 펜티엄으로 불린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의 발전과 함께 꾸준한 호황을 이어갔다.
성장을 거듭하던 용산전자상가는 1997년 IMF 시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한 가계 위축에 컴퓨터 판매가 줄기 시작했다. 새 제품을 구입하기보다는 기존 보유 제품 업그레이드나 중고를 구입하는 소비자가 늘어갔다.
김 조합장은 “용산전자상가에 2~3년간 불황기가 찾아온 때”라고 설명하며 “이후 컴퓨터 매출이 회복됐지만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유통업계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인터넷 유통업체들이 기존 오프라인 유통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조합장은 유통 원가에 가까운 가격들이 인터넷상에서 공유되며 오프라인 고객들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고객들은 더 싸고 더 편리한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장 관리비와 인건비를 모두 충당하기에는 가격 경쟁이 너무 치열했습니다.”
이후 용산전자상가는 손님이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용산전자상가는 제2의 전성기를 위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조성이 그것이다.
김 조합장은 “용산 지역이 개발되면 전자상가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춰 새로운 도약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외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용산전자상가가 다시 한 번 전자제품 메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창욱기자 monocl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