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104>오명 차관과 TDX개발계획

TDX―오명 차관과 TDX개발계획

1981년 5월 28일.

정부는 이날 신임 체신부 차관에 오명 대통령 과학기술비서관(체신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과기 부총리, 건국대 총장 역임, 현 웅진에너지·폴리실리콘 회장, KAIST 이사장)을 임명했다. 이 인사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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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우 국무총리가 1981년 5월 29일 오명 체신부 차관(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3월 10일 남덕우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의 일괄사표를 제출받아 이 중 일부 개각을 단행했다. 체신부 장관에는 최광수 전 제1무임소 장관(대통령비서실장, 외무부 장관 역임)이 임명됐다. 전 대통령은 이어 4월 정부 조직개편으로 청에서 부로 승격된 일부 부처 장관과 차관, 청장, 시도지사 등의 대폭 인사를 마무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이뤄진 체신부 차관 인사는 관가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차관 인사는 최광수 장관이 전 대통령에게 오명 비서관을 차관으로 강력히 추천해 단행된 인사였다.

오명 차관의 증언.

“청와대 비서관 생활이 8개월에 접어들 무렵, 최광수 체신부 장관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내게 체신부 차관으로 와서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김재익 대통령 경제수석(작고)도 전자산업을 육성하는 데는 체신부가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격려했다. 김 수석은 나를 청와대로 부르고 최 장관과 함께 체신부 차관으로 천거한 분이기도 하다. 그가 나를 체신부로 떠나보낼 때 했던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전자산업을 일으키고 싶다면 체신부로 가야 합니다. 비서관으로 일하는 것보다 주무부처에서 차관으로 직접 뛰십시오`라고 한 말이다.”(자서전 `30년의 코리아를 꿈꿔라`에서)

당시 오 차관의 나이는 41세.

전 대통령은 오 차관이 집무실로 인사를 하러 가자 통신 현안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했다.

“당신은 전자공학 박사니까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체신부를 잘 이끌어 주시오. 차관은 대단히 높은 직책이오. 매사에 조심하고 특히 기자를 만나 이야기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오 차관의 발탁은 파격이었다. 그는 깜짝 놀랄 만한 젊은 차관이었다. 그 또래 나이라면 기업에서 차장 직급이 될까 말까했다. 육사(18) 출신에다 공직 경험은 청와대 비서관 8개월이 전부였다.

체신부 국장급은 예순을 내다보는 나이였다. 차관 취임식을 앞두고 체신부 총무과장이 오 차관 집을 찾아왔을 때 오 차관이 “제 아내입니다”라고 아내를 소개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너무 젊어서다. 이후 체신부 내에 `차관 사모님이 총무과장 며느리와 같은 나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오 차관은 취임 첫날부터 관행이나 관습이 아닌 새로운 리더십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사무실이나 책상 위치를 바꾸지 않고 전임자가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체신부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일을 추진했다.

그는 미래 희망만을 체신 공직자들에게 주문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체신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국을 부자 나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진정한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우편과 전신, 전화 업무를 담당하는 부처인 체신부를 정보사회를 리드하는 부처로 바꾸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불러 현안 강의를 듣는 등 `공부`를 시작했다.

간부회의 때도 세미나를 했다. 1년쯤 계속하자 파격적인 제안이 쏟아져 나왔다. 공직자들의 정보화 마인드도 남달랐다.

이를 근간으로 1980년대 초 `2000년까지의 정보통신 장기계획`을 수립했다. 지식이 모여 미래를 밝히는 `정보화 등불`이 된 것이다.

오 차관의 회고록 증언.

“최 장관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늘 부하들이 앞장서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책임지고 판단을 내렸다. 나는 훗날 장관이 됐을 때 결제문서를 거의 읽어보지 않고 사인했다.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아랫사람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 차관은 먼저 전화 적체를 해소하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 전화는 권력(權力)과 부(富)의 상징이었다. 전화는 백색과 청색 두 종류가 있었다. 청색전화는 전화국 소유로 임대전화였다. 백색전화는 개인 소유로 매매가 가능했다. 백색전화 거래가격은 서민주택 가격과 맞먹었다.

당시 체신부를 출입했던 D일보 N기자의 말.

“나는 법조와 체신부를 같이 출입했습니다. 체신부 출입기자로 등록하자 얼마 후 백색전화를 집에 한 대 설치해 주더군요. 셋집살이를 할 때였는데 6개월쯤 지나 집사람이 전화를 팔자고 해요. 전화를 팔면 작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아내 말에 일리가 있더군요. 기자 월급으로 내 집 갖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전화를 팔아 이사를 했고 그것이 살림밑천이 됐어요.”

전화를 설치하는 데도 우선순위가 있었다. 1등급에서 5등급까지인데 권력기관이나 고위층 등은 앞 등급이었다. 일반인은 5등급이었다.

오 차관은 이런 현실이 가슴 아팠다. 전화를 대량 공급하려면 먼저 전화국에 교환기를 설치해야 했다. 당시 교환기는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기술빈국의 설움이자 아픔이었다.

오 차관은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시절 `전자공업육성안`을 입안한 바 있었다.

그 핵심은 전자교환기와 반도체, 컴퓨터를 3대 전략품목으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오 차관은 자신이 입안한 전자공업육성책의 핵심인 전자교환기 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은 당시에는 `쿠데타적 발상`이었다. 그런 계획을 정부는 그동안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당연히 전자교환기 개발에 정부나 업계의 시각은 부정적이었다. 국내에서 개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연구진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 교환기를 공급하던 외국 업체들은 국산화가 불가능하다고 자신했다. 심지어 전자교환기 개발은 가능성이 없다는 보고서까지 버젓이 나돌았다.

이런 가운데 연구개발사업은 한때 좌초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81년도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의 연구개발비가 전액 삭감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난 것이다.

체신부 기획예산담당관실에서 총괄사무관으로 1981년도 예산편성 작업을 했던 김부중 계장(한국통신 기획조정실장, KT파워텔 사장 역임. 현 성결대학교 강의교수)의 증언.

“그 시절 시분할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1981년도 예산편성을 하는데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개발비가 전액 삭감돼 예산담당관실로 넘어 왔습니다. 체신부 기술정책관실에서 연구개발비를 몽땅 삭감했어요. 연구소에서 난리가 났어요. 시분할전자교환기 연구책임자인 안병성 박사(작고)와 박항구 박사(TDX개발단장 역임. 현 소암시스텔 회장)가 자료를 준비해와 `개발할 수 있다`며 연구비 반영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김 계장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를 수십 번 오가며 자료를 검토하고 성공 가능성을 분석했다. 그는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김영도 기획예산담당관(한국통신 기술기획실장 역임)과 배호원 기획관리실장(작고. 체신공제조합 이사장 역임)에게 차례로 보고한 후 청와대로 들어가 오명 과학기술비서관에게 전자교환기 연구개발비에 관해 브리핑했다.

김 계장의 계속된 증언.

“오 비서관이 보고를 받고 잠시 생각하더니 `예산에 반영하라.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삭감됐던 연구개발비를 전액 다시 예산에 반영했습니다. 그때 오 비서관이 박항구 박사의 전화번호를 묻더군요. 뒤에 이야기를 들으니 오 비서관이 박 박사를 불러 내용을 소상히 보고받고 연구소에 가서 교환기 개발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오 차관의 이어지는 회고록 증언.

“전자교환기 개발이야말로 내가 체신부로 온 이유였다. 나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것을 성공시켜야 했다. 나는 여러 각도의 다양한 논리로 체신부 간부들을 설득해 반대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다. 나는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최순달 소장(체신부 장관 역임)을 불렀다.”

오 차관이 전하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 차관=전자교환기를 국산화합시다. 우리가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정부가 연구소에 투자한 모든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최 소장=(깜짝 놀라며) 차관님, 적어도 100억원 이상 개발비가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지금 10억원짜리 연구 프로젝트도 없는데 100억원이 가능하겠습니까.

△오 차관=그럼 100억원을 드리지요. 그러면 할 수 있겠습니까.

△최 소장=당장 대답할 수 없으니 시간을 좀 주십시오.

최순달 전 체신부 장관의 회고.

“나는 교환기 전문가는 아니지만 정부 출연연구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차관 제안이 국민 생활 질을 높이고 국민 편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때까지 TDX라는 것은 미래기술이었기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 후 최 소장은 부소장인 경상현 선임연구부장(체신부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역임. 현 KAIST 겸직 교수)과 차관실로 왔다.

최 소장은 200억원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 차관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확실했다. 그만큼 자신에 차 있었다.

“충분히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반드시 성공해 한국의 통신기술 발전에 새바람을 일으켜주세요. 이번 전자교환기 개발만 성공하면 앞으로 수백억원 규모의 대형 R&D 프로젝트가 얼마든지 가능해 집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모든 과학기술인 앞에 죄인이 될 것입니다.”

오 차관은 그 자리에서 200억원이라는 거액의 개발비를 구두 승인했다. 최 소장과 연구소는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 전자교환기 개발은 꼭 성공해야 할 일이 되고 말았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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