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91>(1)하나로통신출범

어느 때건 변화는 시대의 변곡점이 됐다.

하나로통신은 한국정보통신사(史)에 크고 선명한 두 가지 발자취를 남겼다.

하나는 국내 시내전화 경쟁체제시대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한 것이다. 사용자들이 통신서비스를 상품처럼 선택할 수 있어 100년간 유지해 온 한국통신(현 KT)의 시내전화 독점체제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다음은 전화모뎀보다 100배 빠른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인터넷강국으로 비상(飛上)했다.

제2 시내전화사업자로 선정된 하나로통신은 1997년 7월 21일 초대 사장에 체신부 차관을 지낸 신윤식 우정사업운영위원장(하나로통신 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회장 )을 내정했다.

하나로통신 지분 10%를 보유해 최대 주주인 곽치영 데이콤 사장(16대 국회의원, 한국위치정보 회장 역임)은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 2대 주주인 한국전력과 두루넷을 비롯해 삼성전자, 현대전자, 대우통신, SK 텔레콤 같은 주요 주주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주협의회를 열었다. 회의 후 곽 사장은 정보통신부가 추천한 신윤식 전 차관을 만장일치로 초대 사장에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신 전 차관은 하나로통신 주주협의회가 열리기 전 자신이 초대 사장으로 가게 될 것임을 알았다. 신 전 차관은 당시 데이콤 고문이면서 순천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정보사회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폭넓은 공직 경험과 이론을 접목해 학생들의 인기가 높았다.

신 전 차관은 7월 18일 정통부 장관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강봉균 장관(청와대 경제수석, 재경부장관 역임, 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 급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신 전 차관의 증언.

“약속한 날 정통부 장관실에서 강 장관을 만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강 장관이 새로 출범하는 하나로통신 사장을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강 장관이 `한국통신 사장이 이계철 전 정통부 차관(현 방송통신위원장)이어서 제2 시내전화사업자인 하나로통신 사장도 차관 출신 중에서 선임할 방침`이라며 `하나로통신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창립준비위원장을 맡게 됐습니다.”

강봉균 장관의 회고.

“통신경쟁 시대를 맞아 한국 최대 통신기업인 한국통신과 경쟁하려면 통신 분야를 잘 알고 특히 소신과 추진력이 강한 분이 사장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신 전 차관이 가장 적임자였습니다. 그는 정통 체신관료로 이 분야를 잘 아는 분입니다.”

신 전 차관은 이튿날 창립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서울 용산 한강로 국제전자센터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신 전 차관의 계속된 회고.

“사무실로 출근했더니 준비위원회에 한전과 두루넷 등 대주주사 임원 30여명이 나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무단장은 조익성 데이콤 상무(데이콤 전무 역임)가 맡고 있었어요. 실무는 윤경림 데이콤 과장(하나로텔레콤 영업부문장, KT 미디어본부장 역임, 현 CJ그룹 기획담당 부사장)이 담당하고 있더군요. 첫날부터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사장 내정자 신분으로 하나씩 현안을 챙기면서 출범 작업에 박차를 기했다. 당장 시급한 일은 납입자본금이었다. 처음 하나로통신은 자본금을 1조원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 자본금을 7000억원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이듬해 1분기까지 분할납부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유는 경기침체에 따른 자금난이었다. 중소 주주사들이 가장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자본금 분할납부를 앞장서 주장한 측은 2대 주주인 한국전력이었다. 이종훈 한국전력 사장(한국공학원이사장 역임, 현 한전이사회 의장)은 강봉균 장관에게 그런 요구를 해 놓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5000억원만 납입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신 사장 내정자는 안 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강 장관을 만나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신 사장 내정자의 증언.

“2대 주주인 이종훈 사장과 두루넷 이용태 회장(삼보컴퓨터 회장 역임, 현 숙명학원 이사장)과는 의기투합했습니다. 공교롭게 세 명이 농업학교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었어요. 하지만 자본금 분할에는 반대했습니다. 처음 한 약속도 안 지키는데 나중에 납부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강 장관이 지금 경제상황이 어려우니 분할 납부하도록 하자고 해 그렇게 했습니다. 7000억원으로 조정했지만 이도 채우지 못했어요.”

정통부는 하나로통신 납입자본금 마감을 8월 23일에서 9월 5일로 연기하고 법인설립 일정도 조정해 창립총회를 9월 23일 열기로 결정했다.

하나로통신 컨소시엄에 참여한 444개 주주 가운데 지분 1% 미만인 중소기업이 422개에 달했다. 이 중 40%에 달하는 170여개가 자금난을 이유로 지분축소를 희망할 정도였다.

9월 19일, 신 사장 내정자는 창립총회를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전국 초고속망 시내전화사업자라는 신조로 초고속인터넷 시대를 열어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서비스 일정은.

▲하나로통신은 초고속망 시내전화 사업자라는 개념으로 회사를 설립하며 1998년 10월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손익분기점 시기는 언제로 보나.

▲2004년으로 가입자는 650만여명에 달할 것이다.

-조직과 인력은.

▲회사조직은 팀제로 운영하며 내년.초까지 400여명을 확보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의견을 듣고 이를 토대로 실무진과 토론을 거쳐 중요 정책을 결정할 생각이다.

9월 23일 오전 10시.

하나로통신은 서울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최대주주인 데이콤을 비롯해 350여개 주주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어 내정한 신윤식 전 체신부 차관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주주사가 444개에서 350여개로 준 것은 자금난으로 90여개가 자본금 납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감사에는 오성균 전국회통신과학기술위원회 수석전문위원(하나로통신 고문 역임), 부사장에는 김영철 데이콤 부사장(작고), 상무에 남기철 한국전력 정보통신처장(하나로산업개발 사장 역임)이 각각 선임됐다.

또 곽치영 데이콤 사장, 김정부 한국전력 전무, 서진구 두루넷 부사장(코인텍 사장 역임), 서병문 삼성전자 상무(현 경기콘덴츠진흥원 이사장), 정일상 대우통신 전무(대우자동차판매 대표 역임), 김호영 현대전자 상무(현대해상화재보험 부사장 역임), 김신배 SK텔레콤 이사(현 SK그룹 부회장) 모두 7명을 비상임이사로 선임했다.

하나로통신은 초기자본금을 7000억원으로 정했다. 하지만 경기침체에 따른 중소주주사들의 자금난으로 2차 실권주를 발생했다. 이에 따라 하나로통신은 6004억원의 자본금으로 출범하게 됐다. 신 사장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하나로통신은 1998년 10월부터 3개월간 시범서비스를 거쳐 1999년 서울, 부산 등 6대 도시와 제주지역을 대상으로 상용서비스에 들어가고 2003년에는 전국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서비스도 고도화된 시내망을 통해 기존 음성서비스는 물론이고 데이터, 영상이 복합된 초고속 멀티미디어서비스 제공에 주력하기로 했다.

하나로통신은 2003년까지 총 5조8000억원을 초고속광통신망 구축을 위한 각종 전송 및 선로설비에 투자하기로 했다.

서비스 첫해인 1999년에는 국내 시내전화시장의 2.6%인 1400억원의 매출에서 2004년에는 2조9000억원(국내 전체시장 10조4000억원의 28.4%)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윤식 사장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서울대를 나와 1964년 행정고시 1회에 합격, 체신부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체신부에서 전남 체신청장과 우정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 등 체신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학구파 공직자였다. 차관 시절인 1990년 중앙대에서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정보화사회의 정보통신 행정에 관한 연구`였다. 정통부가 출범하기 몇 해 전 이미 미래 행정조직에 관해 연구를 한 것이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매일 새벽 학원에 나가 일본어와 영어공부를 했다.

그의 학구열은 체신부 계장 시절부터 시작했다. 계장이지만 통신기술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남몰래 전기기사자격증을 따는 학원에 다녔다. 6개월가량 다니자 학원 측이 그에게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라고 권했다.

과장 시절에는 현장 경험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점퍼차림으로 전화수리공 양성 학원에 다녔다. 전화가 고장나면 전신주에 올라가 고치는 전기공학을 공부하면서 실무를 익혔다. 그가 체신부 과장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체신부 차관을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한 후 데이콤 사장으로 일했다.

그는 정권 교체기나 개각이 있을 때 장관 후보로 16번이나 언론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문민정부 출범 직전에는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 김 당선자와 독대를 했다.

그의 증언.

“1993년 2월 20일 토요일 김 당선자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용인에서 정동로터리클럽 초대 회장으로 행사 중이었습니다. 당시는 휴대폰이 없어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았습니다. 다시 연락이 와 월요일인 22일 오후 2시 서울 하얏트호텔 16층에서 김 당선자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호텔에서 한 시간여 대화를 나눴다. 김 당선자의 인간적인 흡인력은 대단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김 당선자는 철저한 보안을 당부했다. 아내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장관 발탁은 불발로 그쳤다. 김 당선자와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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