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64>

 한미통신회담<7>

 

 공짜 점심이 없듯이 대가(代價)없는 협상은 없다.

 한미 통신협상이 타결됐지만 그것이 종막(終幕)이 아니었다. 합의사항 이행이란 채무가 남아 있었다. 한미 협상타결은 통신 분야 새로운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미 양국은 통신회담 타결시 매년 통신협의회를 열어 합의사항 이행여부와 양국 간 애로사항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매년 3월말 발표하는 무역장벽보고서에 그 결과를 반영키로 했다. 이 내용은 두고두고 화근(禍根)이 됐다.

 합의사항 이행여부를 보는 한미 양측 시각은 일치하지 않았다. 이행 과정에서 양국 간 갈등이 하나씩 수면위로 떠올랐다. 미국 측의 한국 불신도 점점 누적됐다.

 1993년 1월 20일.

 클린턴 미행정부가 출범했다. 클린턴 정부는 자국산업 보호와 이익극대화를 기치로 내세웠다. 통상정책은 수입규제 강화 등 강경 보수로 선회했다. 미국 교역상대국도 시장을 개방해야 하며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슈퍼301조 등을 부활해 무역보복을 하겠다는 경고였다. 클린턴 행정부는 실제 시장 개입에 적극적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 기조는 대외 정책에 곧바로 반영됐다.

 그해 2월4일과 5일 양일 간 한미 양국은 미국 측 요구로 워싱턴 DC 미 USTR에서 한미통신협의회를 열었다. 클린턴 정부 출범 후 변한 미국 측 통상정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첫 회의였다.

 한국 측에서 이종순 체신부 통신협력단장(정통부 국제협력국장, 아태전기통신협의체 사무총장 역임, 작고)을 수석대표로 9명의 대표단이, 미국 측에서 낸시 애덤스 미USTR부대표보를 수석대표로 콜린스 한국담당과장 등이 참석했다.

 미국 대표단은 클린턴 정부의 강경 통상정책을 반영하듯 공세를 취했다.

 당장 1992년 선경그룹(현 SK그룹)의 대한텔레콤 사업권포기로 중단된 제2이동전화사업허가와 관련, 사업 재허가를 빠른 시일 내에 추진해 줄 것을 희망했다.

 이종순 단장은 이에 대해 “제2이통 사업자 선정은 차기정부에서 결정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답변했다.

 미국 측은 한국통신(현 KT)의 조달규정 미공개와 미국 AT&T의 한국 공급자격 인증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문제는 한미 간 가장 큰 쟁점이었다.

 그동안 미국 측은 약 4000억원에 달하는 한국의 통신장비 구매입찰에 미국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입찰참가 자격, 기준, 절차 등을 조속히 공표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미국 측은 “1992년부터 미국에 개방된 한국통신 통신망장비 구매 시 AT&T의 입찰참여자격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며 “만약 한국이 이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정부조달에 관한 양국 간 합의사항 위반으로 간주해 통신협정불이행국으로 결정해 보복조치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그 무렵, 한미 양국은 자동차와 반도체 등 통신 분야 이외의 통상현안을 놓고 밀고 당기는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미국 측은 “한국이 1993년 1월 1일부터 한국통신등의 통신망장비 조달시장을 외국업체에 개방하기로 약속해 놓고 관련 규정을 공개하지 않아 미 통상법상 시한인 3월 31일까지 협정위반사실을 의회에 보고하고 즉각적인 제재조치를 발동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한국 측에 거듭 전달했다.

 미국 측은 한국통신이 교환기 등의 구매절차를 최초조달, 후속조달 등으로 구분해 기존에 교환기를 공급해온 국내제조업체들을 후속조달자로 인정하고 AT&T 등은 최초조달로 별도의 절차를 두고 있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이종순 단장은 한미협의회 후 “미국 측이 문제 삼는 통신망장비 공급자격자인정절차, 기술개발촉진법에 의한 국산품우선구매 등을 그대로 두면 무역마찰로 대두될 가능성이 상존하므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우려감을 나타냈다.

 그해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문민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창조와 신경제 실현을 기치로 내걸었다. 국정목표를 경제회복과 부정부패 척결에 두었다.

 문민정부는 정보통신 정책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김 대통령은 1994년 12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했다. 각 부처로 흩어졌던 정보통신 관련 정책도 정통부로 일원화했다.

 김 대통령은 첫 조각에서 체신부 장관에 정통 체신관료인 윤동윤 차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회장)을 임명했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3월 31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를 했다.

 이 자리에서 윤 장관은 통신국제협력과 관련 “UR(우루과이라운드)협상 후 예상되는 통신개방 요구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고 한미통신회담 합의사항인 통신망장비 및 부가통신사업 개발에 대비해 국내통신 산업을 적극 육성해 나가겠다”고 보고했다.

 3월 들어 한동안 잠잠했던 한미 양국 간 통신 분야에 적신호가 켜졌다. 미국 측이 한미 통신합의사항을 한국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판단, 한국에 대한 강력 제재조치에 착수한 것이다.

 한미 양국은 그해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워싱턴에서 무역실무회의를 열어 새 정부출범이래 첫 통상현안에 대해 이견해소 방안을 논의했다.

 한국 측에서 홍정표 외무부 통상국장(주 인도네시아 대사 역임)이 수석대표로, 미국 측에서 로버트 캐시리 미 USTR대표보가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양국대표단은 현안이었던 △지적재산권 보호문제 △UR협상 △양국 영업환경 개선 △쇠고기 시장 개방 등을 두루 협의했다.

 미국 측은 통신시장 개방과 관련, 한국 측이 한국통신의 조달규정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미국기업의 참여를 배제하려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미국 측은 5월에 있을 한국통신의 교환기구매입찰에 AT&T를 교환기공급자격자로 즉각 인증할 것을 요구하며 종합무역법 1377조에 따라 미의회에 보고한 뒤 즉각적인 제재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사태가 악화되자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한승주 외무 장관(현 2022월드컵 유치위원장)은 3월 26일 미키 캔터 미 USTR대표를 만났다.

 한 장관은 “미국업체의 한국통신 통신망 장비조달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며 슈퍼 301조 부활 등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한 장관은 AT&T의 한국통신 교환기 입찰참여 문제는 현재 한국통신에 공급되는 기기를 공급할 경우에 한해 이른 시일 안에 참여를 허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부 공식 입장을 전달했다.

 체신부는 3월 29일 워싱턴에서 현지 업계설명회를 갖고 교환기공급자격인증절차에 대한 미국업계의 이해를 구했다. 체신부는 한국통신과 AT&T 간의 문제해결에도 적극 나섰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강경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미 국가경제회의(NEC)는 3월 29일 공언한대로 한국에 대한 제제 조치를 결정했다. 한국을 통신협상불이행국으로 지정키로 한 것이다.

 체신부 장관 자문관인 최병일 박사(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의 증언.

 “한국 측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질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혼자 미국으로 날아가 3월 31일 미 USTR과 한미무역실무위원회에 참석해 한국 측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공교롭게도 31일 오전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체신부 새해 업무보고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종순 단장도 청와대 참석 때문에 미국에 가지 못했어요. 도리 없이 외교부와 주미대사관 관계자등과 미 USTR와 막후 절충해 합의안을 만들어 이종순 단장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주미대사관 장기호 참사관(주 캐나다·이라크 대사역임)이 미국 측과 협상을 총괄했습니다.”

 이 업무라인은 이종순 단장과 김재섭 과장(서울지방우정청장 역임, 현 지경부 한국스마트그리드사업단장), 석제범 사무관(현 방통위 네트워크정책국장) 등이었다.

 김재섭 과장의 증언.

 “그 당시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파견가서 한미통신회담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1년여 있다가 경영분석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양국은 △한국통신의 조달관련규정이 충분히 공개되고 미국 기업이 국내기업과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조달규정공개의 지연으로 미국 기업이 한국통신의 통신망장비 조달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확인하며 △AT&T가 한국통신 교환기 입찰 시 현재 한국통신에 공급되고 있는 기기를 공급 할 경우에 한해 AT&T 입찰참여를 허용한다 등에 합의했다.

 최 박사는 미국 현지에서 체신부 이종순 단장과 컨퍼런스 콜로 내용을 검토한 후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 USTR에 서한을 보냈다.

 최 박사의 계속된 증언.

 “통신협정불이행국으로 결정되면 미국은 60일 이내에 미국이 입은 피해를 산정, 통신장비를 포함한 한국상품에 대해 약 100%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등 강력한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4월 2일.

 미국은 이날 한국을 통신협정불이행국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미 통신협정 이행을 다짐한 한국 측 서한을 미국 측이 막판에 수용한 것이다.

 미키 켄터 무역대표는 한미통신협정 이행상황과 관련한 발표문을 통해 “한국은 미USTR와 긴밀한 협의 끝에 양국통상협정을 이행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로 했다”며 “미국은 한국의 새 정부가 통신협정과 관련한 쟁점들을 타결하려는 노력들을 평가한다”고 말했다.

 협상 이행을 놓고 불거진 양국 통신마찰은 일단 해소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미 통신 분야의 이익갈등이 수시로 불거져 체신부는 바람 잘 날이 거의 없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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