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통신협상(1)
국가 간 통상 협상은 포성 없는 전쟁이다.
협상장은 무기 대신 날카로운 논리가 포성을 대신하고 ‘허허실실(虛虛實實)’이나 ‘성동격서(聲東擊西)’ 등의 전략이 난무한다. 미소 뒤에 철저한 국가 이익이 숨어있다. 이익 앞에는 ‘어제 동지’가 ‘오늘 적’으로 변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7월 ‘협상대표는 동네북인가’라는 책이 출간됐다. 저자는 한미쇠고기협상수석대표를 맡았던 민동석 현 외교부 차관이다. 직업외교관인 그도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한 쇠고기협상타결 후 엄청난 정신적 시련에 시달렸다. 협상대표는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동맹관계인 한국과 미국도 국가 이익을 놓고 한치 양보 없는 팽팽한 통신협상을 했다.
시계추를 과거로 돌려 복잡했던 한미 통신협상의 험하고 고된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987년 1월.
미국이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무역실무회의에서 처음 한국통신시장 개방을 공식 제기했다. 그 전까지는 한국에 통신시장 개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 번 말문을 연 미국은 그해 4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통신협의회에서도 시장 개방을 거듭 요구했다. 이후 한미 양측은 통신시장 개방 범위와 내용, 형식을 놓고 양보 없는 힘겨루기를 했다.
최영철 체신부 장관(국회부의장, 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의 회고.
“그 무렵, 한국시장은 규모도 작고 국산기기도 별로 없었어요. 통신시장 규모가 차츰 커지자 미국이 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입니다. 통신시장을 개방 안 할 수는 없지만 당시는 내부 경쟁력을 갖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미 양국은 1988년 6월 15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체신부 회의실에서 3차 통신협의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박성득 정책국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을 단장으로 5명의 대표단이, 미국은 찰스 스코트 상무성 정보통신담당차관보를 수석대표로 한 5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협의회에서는 부가가치통신망(VAN)시장 개방과 통신기자재 관세인하 및 형식승인 완화, 전산망 기술기준 완화 등을 집중 요구했고 한국 측은 국내 실정에 맞게 단계적 개방을 추진해 나간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1988년 12월 29일.
정부는 오후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 등 긴급 경제현안을 다루기 위한 12개 실무대책반을 편성했다. 이어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조순 부총리(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역임, 현 서울대 명예교수) 주재로 첫 대책반장회의를 열었다. 통신망사업개방대책반장은 신윤식 체신부 차관(데이콤 사장, 하나로통신 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이사장)이 맡았다. 대책반은 외무부, 재무부, 상공부, 과기처, 체신부 등 관계 국장과 학계 인사 등으로 구성했다. 미국의 통신시장 개방 압력과 관련, 대응방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은 그해 8월 23일 종합무역법에 통신규제 조문을 신설했다. 미국은 1989년 2월까지 통신분야 우선협상대상국을 선정해 의회에 보고하며 ‘수퍼301조’ 신설 등 불공정 무역관행 대상국에 대통령이 보복할 권리를 포함시켰다. 강력한 통상압력 수단이었다. 미국은 이 법에 따라 주요 국가의 통신시장 현황을 조사하면서 한국을 우선협의대상국을 지정한다는 입장이었다.
정부는 1989년 1월 16일 오후 체신부 회의실에서 외무부, 상공부, 재무부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윤식 차관 주재로 대책반 회의를 열고 한미 양국 간 통신현안에 대한 대외 개방 방안을 논의했다.
1989년 1월 26일.
최영철 체신부 장관은 오후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새해업무보고를 통해 통신기술고도화와 대북방송통신교류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최 장관은 통신시장 개방은 불가피하므로 개방압력에 대비, 전담반을 편성하고 주미 대사관에 통신협력관을 파견하겠다고 보고했다. 최 장관은 VAN도 점진적으로 개방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체신부는 그해 9월 주미대사관에 이종순 체신부 서기관(정통부 국제협력국장, 아태전기통신협의체 사무총장 역임, 작고)을 파견했다.
정부는 미국과 직접 통신협상을 갖고 우선협상국 지정을 피해 나간다는 방침을 정했다.
체신부는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워싱턴에서 한미 통신협상을 열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미국은 2월 1일 협상초안을 우리 측에 제시했다. 미국 요구를 한국이 수용할 경우 우선협상국 지정에서 제외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미국 요구는 크게 △통신서비스시장 개방 △통신기기 시장 개방 △무선서비스 개방 △관세율 인하 등이었다.
통신망사업개방대책반은 미국 측과 최종 협상선과 대응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2월 8일과 9일 연달아 열었다.
정부는 대책반 논의 내용을 종합해 마련한 정부 훈령을 한국 측 수석대표인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에게 내렸다. 협상대표는 훈령의 범위 안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훈령 범위 내에서 수석대표에게 협상전권을 넘기고 만약 협상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려워 결렬이 불가피하면 미국의 우선협상국 지정을 감수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협상을 타결할 경우 미국 행정부가 2월 23일까지 의회에 보고하는 우선협상국 대상에서 한국은 제외될 수 있었다.
한국 대표단은 2월 11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13일부터 미국 워싱턴 미통상대표부(USTR)에서 17일 새벽까지 마라톤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피터 알가이어 무역대표보(補)였다. 미국 측 개방요구는 거칠었다.
당초 회담일정은 16일까지 4일간이었다. 한국대표단은 일정을 연장해 미국의 우선협상국 지정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협상단은 미국이 요구한 13개항을 놓고 최대한 절충점을 모색했으나 미국 측이 전화와 전신 등 협의의 통신장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비규제통신산업(NTNS)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규정하고 전면 조기 개방을 요구해 접점을 찾지 못했다. 미국 측은 국내 VAN은 1991년 1월까지, 국제 VAN은 1991년 7월까지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관세장벽 철폐와 투자제한 철폐, 미국 제품 구매, 무전기규제완화 등도 요구했다.
박 단장의 증언.
“통신은 미래산업인데다 당시 우리 통신산업 수준은 미국에 비해 낙후했습니다. 한번 통신시장을 개방하면 다시 막을 수가 없고 통신산업 발전이나 기술자립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남북이 대치하는 분단국으로 국가안보상 무선서비스 개방은 수용할 수 없었어요. 국가의 신경망인 통신을 외국에 내주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미국 요구는 무리한 내용이 많아 일정을 연기하면서 협상했지만 미국 측과 타결점을 찾기는 불가능했습니다.”
미국의 통신개방 요구에 대해 정부 훈령은 1992년부터 개방을 수용한다는 방침이었다. 통신기기에 대한 관세율도 현행 15%를 미국은 5%로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9%선으로 내리는 안을 가지고 있었다.
박 단장은 처음 개방시기를 1996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측이 거부하자 다시 2년 앞당겼다. 정부 훈령보다 2년이 늦은 것이었다. 박 단장은 사안마다 규정을 세밀하게 보면서 정확한 수치와 통계를 근거로 미국 측 요구를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미국 측 피터 알가이어 수석대표가 박 단장을 향해 물었다.
“본국에서 1996년으로 훈령을 보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조회해 주십시오.”
미국 대표단이 한국 정부 훈령내용을 알고 묻는 것이었다.
이튿날 미국 대표가 “회신이 왔느냐”고 묻자 박단장은 “아직 안왔다”며 시치미를 땠다.
협상 마지막날인 2월 17일 새벽 2시경. 벼랑 끝 대치와 협상 연장, 이제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박 단장이 미국 대표에게 잠시 협상 중단을 제안했다.
“잠시 쉽시다.”
박 단장은 대표단들과 긴급 회의를 했다. 대표단은 상공부, 조달청 등 유관 부처 과장급과 대사관 직원 등 모두 10명이었다.
박 단장의 말.
“이들에게 ‘협상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더 이상 양보하면 안된다’와 ‘그래도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반반이었습니다. 그러자 단장인 저보고 최종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민하다가 결렬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우리가 미국 측 요구를 수용했더라면 한국 무선통신시장과 IT산업은 외국에 종속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속개한 협상에서 미국 측에 결렬을 선언했다. 박 단장은 당시 사표 낼 각오를 했다. 정부 훈령을 어긴 셈이었다.
협상 결렬을 한국 측이 선언하자 미국특파원들의 취재경쟁이 뜨거웠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지자 귀국 비행기시간을 늦추고 협상결렬 배경을 설명했다.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습니다.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나는 협상이 결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통신협상대표가 미국에 대해 먼저 결렬을 선언한 것은 초유의 사태였다. 당시 박 단장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박 단장이 귀국해 최영철 장관에게 협상결렬을 보고하자 통이 큰 최 장관은 “수고 했다”는 말로 박 단장을 격려했다.
최 장관의 증언.
“내심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때로는 정부 훈령을 어기고 협상을 깨야 상대방도 긴장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다보면 우리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사전 대비도 없이 통신시장을 개방할 수는 없었어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최 장관은 박 단장에게 질책도 하지 않았다. 통신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를 그에게 맡겨 미국과 통신시장 개방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만들도록 지원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