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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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1993년 6월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제2 이동통신 방식을 CDMA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CDMA 태클

 

 1993년 2월 25일.

 노태우 정부가 물러나고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정권이 바뀌면 권력지형과 행정조직도 변한다. 체신부 장관에 정통 관료 출신 윤동윤 차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이 발탁됐다. 차관에는 CDMA 기술을 도입한 경상현 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 겸직교수)이 임명됐다.

 윤 장관의 회고.

 “장관이 되고 보니 두 가지 현안이 있었어요. 하나는 선경그룹(현 SK그룹)이 반납한 제2 이동통신사업자를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해 국민이 공감할 수 있게 선정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CDMA 방식의 이동통신 개발에 성공하는 일이었습니다.”

 윤 장관은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문제를 각계 의견을 수렴해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맡기는 절묘한 선택을 했다.

 윤 장관은 이어 “CDMA 개발에 장관자리를 걸겠다”며 매달 CDMA 개발사업 추진상황을 보고 받고 관계자들을 독려했다.

 윤 장관의 말.

 “그 당시 나는 CDMA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만약 내가 이공계 출신이어서 이 분야를 잘 알았다면 그렇게 과감하게 상용화를 추진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무렵, 체신부와 상공자원부는 정보산업 관할권을 놓고 수시로 격돌했다.

 김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겠다고 공약했고 당선 후 행정쇄신위원회(위원장 박동서)를 구성해 정부 조직개편안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업무영역을 놓고 체신부와 상공자원부, 과기처 간에 조직을 지키기 위한 줄다리기가 치열했다.

 윤 장관은 부처 간 갈등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는 장관 취임 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을 위해 몇 달 동안 매일 오전 장관실에서 윤창번 박사(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하나로텔레콤 회장 역임, 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 등 전문가들과 토론을 했고 이를 정책으로 추진했다.

 윤 장관은 부처 간 현안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경제부처가 있는 과천 정부청사에서는 ‘윤 장관이 남태령을 넘지 않게 하라’는 말이 나돌았다. 파워와 구설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황중연 장관 비서관(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부회장)의 말.

 “당시 그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윤 장관이 과천에 나타나면 큰소리가 나니까 그전에 체신부와 문제를 해결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업무가 겹치는 상공부는 체신부에 대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했고 CDMA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해 3월 6일.

 상공부는 체신부가 국책사업으로 개발 중인 CDMA 방식 이동통신개발에 대해 서비스 시기와 실용성을 내세워 TDMA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공부는 이날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과 관련한 검토의견 발표에서 “ETRI가 미 퀄컴사 CDMA 방식 원천기술을 도입해 국내 업체들과 개발 중인 CDMA 방식의 이동통신시스템은 시장성과 기술개발 성공이 불확실해 상용화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미국과 일본, EC 등지에서 상용화단계인 TDMA 방식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공부는 그 근거로 CDMA는 1997년 이후에나 서비스가 가능하고, 선진국에서조차 아직 실용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상공부는 TDMA는 앞으로 2년 정도면 개발을 끝낼 수 있고 미국과 일본, EC 등 세계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공부는 이 무렵, 정부 조직개편에 대비해 ‘정보산업 행정체계 개편 방안’이라는 내부 문건도 작성했다. 그 핵심은 상공부 중심으로 정보산업 업무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상공부는 체신부 본연의 업무는 통신서비스 보급·확대로 국한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체신부는 통신정책을 담당하는 ‘통신청’으로 기능을 단순화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은 김철수 장관(세종대 총장 역임, 현 인터내셔널 특허법률사무소 상임고문)이었고 전자정보산업국장은 한덕수 국장(부총리, 국무총리 역임, 현 주미한국대사)이었다.

 이 문서 작성에 관여했던 상공부 관계자 B씨의 증언.

 “당시 상공부는 이대로 있다가는 정보산업에 대한 관할권을 체신부에 빼앗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한다는 것을 제시했고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하면 정보통신산업과 관련 업무는 이관될 게 분명했어요. 자신의 조직과 소관 산업을 체신부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죠.”

 체신부는 정책으로 승부를 내기로 했다. 그해 4월 2일 상공부 주장을 겨냥해 디지털이동전화시스템 조기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상공부에 대한 반격이었다.

 체신부는 ETRI와 퀄컴사가 공동개발 중인 CDMA 방식의 디지털이동전화시스템을 당초 계획인 1997년 보다 2년 앞당겨 1995년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디지털 이동전화 국내표준방식을 올해 안에 CDMA 방식으로 최종 결정하겠다고 못 박았다.

 체신부는 기술적 측면에서 CDMA 방식이 △수용량이 크고 단말기 소모전력이 적어 소형·경량화가 가능하고 △동일주파수를 인접기지국에서 재사용할 수 있어 주파수 이용효율이 높고 △ TDMA보다 기지국수가 적어 설치운용비가 저렴하며 △PCN(개인휴대통신), 위성이동통신 등 기술응용범위가 넓어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TDMA 방식은 금년에 착수해도 독자개발 시 5년 이상, 공동개발 시 4년 이상 소요돼 1996년 이후에나 상용화가 가능해 국제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고, 이에 비해 CDMA는 셀(단위서비스구역)설계 시 극소수 인원으로 가능하고 기지국수를 줄일 수 있어 투자와 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체신부는 그해 6월 15일 청와대 등과 협의를 거쳐 제2 이동통신 서비스방식을 CDMA 방식으로 결정했다.

 윤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어 “제2 이동통신방식을 CDMA 방식으로 결정했다”면서 “국내외의 급격한 기술발전 추세와 해외시장 전망 등 그동안 여건이 현저히 바뀐데다 국내개발 중인 디지털시스템의 조기상용화가 가능해져 CDMA로 최종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발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정책결정이었다.

 먼저 사업자 선정과 기술방식을 연계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책의 불확실성을 제거했고 이로써 CDMA 방식이 제2이동통신 방식이라는 점을 대내외에 확인시켰다. 그동안 CDMA 방식의 이동통신 개발에 소극적이었거나 TDMA 개발을 주장했던 기업들이 화들짝 놀라 CDMA 개발에 총력 질주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의 말.

 “그 당시 TDMA 방식을 개발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기술종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선진국 뒤만 따라갔을 겁니다. 수입제품이 국내 시장에서 판쳤을 겁니다. 우리가 CDMA 첫 상용화에 성공한 결과 휴대폰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윤 장관은 그해 7월 16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방문, “CDMA 개발은 전쟁이다”라는 글귀를 써 붙이라고 지시했다.

 CDMA와 TDMA를 놓고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그해 가을, 국회교체위에서 의원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윤 장관이 삼성전자 임직원의 체신부 출입을 금지시켰다. 당시 140억원을 들여 아날로그 개발에 착수한 삼성 측이 국회의원들을 부추겨 체신부를 몰아붙였다는 의혹을 샀던 것이다.

 출입금지 조치 후 보름 만에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과 김광호 이사 등이 윤 장관을 방문해 사과하고 정부 정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일단락됐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공자원부는 그해 9월 16일 디지털이동통신 단말기 공동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실용화되기 시작하고 있는 T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단말기를 수출상품화하기로 하고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단말기업체와 부품업체가 같이 참여해 단말기와 핵심부품을 공동 개발키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단말기와 디지털 핵심부품개발에 필요한 연구개발비 330억원 중 공통 핵심기술과 디지털 부품개발에 소요되는 개발비 130억원을 공업기반기술개발 사업비 등에서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개발할 단말기는 유럽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유럽형 규격(GSM)과 북미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북미형규격(ADC)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겸용 단말기로 유럽방식은 1993년, 미국방식은 1994년 개발에 착수해 각각 2년 이내에 시제품을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부터 TDMA 방식의 단말기 개발사업이 추진됐다. 이 사업에는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와 삼성전자, 금성정보통신,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이 참여해 미국과 영국에서 기술도입을 했다. 당시 기술도입료로 300만달러를 지불했다.

 상공부 전자정보산업국장은 이희범 국장(산업자원부 장관 역임, 현 STX그룹에너지부문 총괄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장 )이었다.

 이 사업의 기술개발 체계는 체신부가 추진하는 CDMA 개발 추진방식을 그대로 준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국내 기술표준이 CDMA 방식이어서 국내 시장이 형성되지 못했다. 또 원천기술업체에 주는 로열티가 10%에 달했다. 퀄컴의 5%보다 배나 많은 금액이었다. 결국 수출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이 되지 못다.

 부처 간 업무 영역을 둘러싼 갈등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마치 지진(地震)이 몰려오 듯 관가(官街)를 뒤흔들었다.

 이런 갈등의 고비를 넘기고 CDMA 방식의 이동통신개발은 성공고지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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