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반도체 팹리스(팹이 없는 반도체 설계 전문회사) A사는 고객 다변화에 애를 먹고 있다. 삼성에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는 이 회사는 성장에 한계를 느끼고 있어, 고객 다변화가 필수라는 판단을 내렸다. LG에도 제품을 공급하고 싶지만, 이럴 경우 당분간은 매출이 급격히 줄어드는 출혈을 감수해야만 한다. 삼성전자에 밉보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LG 계열사에 반도체를 공급하다 보면 LG 특수 관계사 같은 꼴이 된다. 반도체를 포함해 부품·소프트웨어 업계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줄 세우기’ 관행은 일반화돼 있다.
국내 대표 대기업에 반도체를 공급해야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문제는 한 기업에만 공급하다 보니, 성장을 하더라도 처음부터 한계를 정해 놓은 성장이라는 것이다. 세트 기업의 물량을 어느 정도 차지하고 나면 그 이상이 없다. 더욱이 같은 매출이라도 삼성전자·LG전자에 공급해야만 주식시장에서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는 ‘아이러니’도 문제다.
한 팹리스 업체 사장은 “대기업이 국내 중소 부품회사를 자기 특수관계 회사처럼 키운다”며 “공정한 거래 관행만 자리 잡아도 업계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존재한다. 이른바 생태계다. 충분한 인력이 있어야 하고, 벤처 투자도 활성화돼야 한다. 그만한 기업가치도 인정받아야 한다. 시장에서는 수요도 많아야 하고 공정한 경쟁도 이뤄져야 한다. 기술만이 전부는 아니다.
시스템반도체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산업을 둘러싼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 업체가 성장모델을 제시하고 경쟁력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환경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공정 거래”, 세트와 반도체 상생의 길=팹리스 B회사 사장은 “국내 대기업들은 주문을 할 때에도 공급업체를 고려해 주는 법이 없다”며 “구두로 주문하고 변동이 클 때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하지만 국내 업체에 하는 것과 달리 외국 대형 반도체 업계에는 구매 예측량을 보내 업체가 그에 상응하는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면서 “국내 반도체 회사에도 이런 식으로 대응해준다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공급량을 소화하지 못할 때에는 그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하고, 주문량을 맞추지 못할 때에는 다른 일을 모두 제쳐두고 이 문제 해결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거래 관행은 국내 중소 반도체 회사들을 힘들게 한다. 앞선 사례처럼 고객의 눈치를 보느라 고객 다변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성장 정체뿐 아니라 퇴보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면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내기가 힘들다. 결국 시장이 변화할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또 상장한 회사들은 매출 실적과 순이익을 공개해야 하는데, 적절한 순이익을 인정받지 못할 경우가 많다. 한 해 순이익이 높으면 세트업체들은 그것을 가격 협상에 악용한다는 것이다.
C회사 사장은 “팹리스는 R&D 위주의 기업인 만큼 20%대의 영업이익은 나야 제 가치를 받은 것”이라며 “하지만 세트업체들은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제조업과 동일하게 5~7%의 영업이익에 맞춰 가격 협상을 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요인들로 결국 국내 반도체 중소기업들이 성장하지 못하게 되면 그 피해는 결국 세트업체에 돌아간다.
국내 기업이 해당 반도체를 국산화하면 수입 제품 가격 자체가 낮아지는 효과를 낳는다. 또 국내 기업들은 세트업체들을 근거리에서 대응하고 무엇보다 최우선해 지원하기 때문에 빠른 개발, 생산이 가능해진다. 결국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건재해야 세트업체에도 이득이라는 뜻이다. 세트업체와 부품업계 간의 불공정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는 지적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고부가가치 산업에 대한 재평가 필요=국내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대기업이 제조회사 중심이다 보니 중소기업에 대한 평가도 제조 중심으로 이뤄진다. 주가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적과 성장가능성에 비해 너무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가수익비율(PER)만 봐도 상당히 낮다. 대부분의 기업이 10 이하다. 주요 증권 보고서에는 “PER가 낮고 저평가되어 있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향상되지는 않는다.
국내 최대 팹리스 기업인 실리콘웍스의 PER는 9.6배 수준이다. 아이패드2 수혜주로도 관심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PER는 10에 못 미친다. 순이익이 20%가량인 넥스트칩도 PER는 7~9를 넘지 않는다. 역시 매번 증권사보고서에 저평가돼 있다는 평가가 있을 뿐이다.
국내 대부분의 팹리스들이 5~10으로 저평가돼 있다. 시스템반도체의 부가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2007년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와 FCI의 매각 이후 제대로 기업 가치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 팹리스들은 15 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다 보니 시스템반도체 분야 투자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반도체 투자 펀드조차도 반도체 장비 분야에 관심을 가진다는 지적이다. 신성장동력 펀드 등 정부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위해 조성한 펀드 투자도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가 조성한 펀드라고 해도 육성 의지보다 시장의 가치 판단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도 시스템반도체와 성장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뒷받침돼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
미국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은 바 있는 한 팹리스 사장은 “미국 벤처캐피털은 초기 스타트업을 할 때부터 투자를 시작해 성장할 때마다 단계별 재투자를 진행하는 시스템이 안착화돼 있다”며 “한국에서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서 초기 투자부터 막혀 있다”고 말했다.
◇창업 붐을 일으키자=최근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창업 붐이 사라졌다. 시장이 대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고 인력도 대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큰 축이었던 휴대폰 시장이 스마트폰 시장으로 바뀌면서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공급할 수 있는 기회도 줄었다. 고급형 스마트폰 위주가 되다 보니 반도체도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외국 반도체를 주로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요구하고 있다. 창업과 이어지는 M&A가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문신학 지식경제부 과장은 신생 팹리스를 지원하는 정책인 스타팹리스10 설명회에서 “무엇보다 창업이 줄어드는 것이 큰 문제”라며 “창업 붐을 일으키기 위해 신생 팹리스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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