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자신해 온 한국에서 IT 핵심인 통신 장비 시장 규모가 전 세계 1%라는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5월 중순 내놓은 ‘초점:국내외 네트워크 장비 시장 현황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다. 초고속통신망, 이동통신망의 진화·확산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자부해 온 대한민국이 정작 그 산업에 필요한 통신 장비 업계는 전혀 육성하지 못했다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은 것이다.
문제는 유무선 데이터 트래픽이 폭증해 전 세계에서 네트워크 고도화 작업을 수행하는 가운데서도 우리 통신장비 업체들이 별로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통신 장비 시장 규모는 1191억9800만달러(약 129조318억원)다. 이 중 통신사업자용 824억4200만달러(약 89조2430억원), 기업용 367억5500만달러(약 29억7873억원)다. 국내 통신 3사는 올해 안에 4세대(G) 이동통신 ‘롱텀에벌루션(LTE)’ 도입 계획을 밝혔다. 적게는 1조2000억원(LG유플러스)에서 많게는 3조원(SK텔레콤)까지 투자가 이뤄진다. 전 세계 시장에 견줘 보면 시장 규모 자체가 작다. 통신 사업자의 투자가 국내 통신장비 업계의 몫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전망이다. LTE 구축에 필요한 게이트웨이·기지국 장비 대부분을 삼성전자·LG에릭슨 같은 대기업이나 노키아지멘스·시스코 같은 다국적 기업이 공급하는 것으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한국 통신 장비 업계가 맥을 못 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국내 회사들이 기술 장벽이 낮은 중계기나 댁내광가입자망(FTTH) 장비에 치중해 왔다는 점이 있다. 세계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이 있는 중국산 제품에 밀릴 수밖에 없다. LTE망으로 넘어가면서 기지국과 액세스포인트(AP) 사이 음영지역을 줄여주는 중계기가 쓰이지 않게 돼 더욱 활로를 찾기 힘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한 통신사에 종속돼 장비를 공급해야 한다는 점도 규모가 큰 장비 업체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다. 통신장비 업계 관계자들은 “만약 LG유플러스에 공급하는 장비사가 SK텔레콤이나 KT에 장비를 납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다른 통신사업자와 협력을 맺었다간 철퇴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규모가 작다 보니 고사양 제품을 개발할 여력을 갖기도 힘들다. 통신사업자가 투자를 늘리는 해에는 매출이 올랐다가 이듬해에는 곤두박질치는 사례는 흔한 일이었다.
◇업종 전환이 살길이다=어려운 상황에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회사들이 있다. 기존 업종에서 탈피해 신시장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중계기 업체 쏠리테크는 파장분할다중화(WDM) 수동광통신망(PON) 장비 개발에 성공했다. PON의 수동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이다. 통신망에 WDM-PON을 적용하면 통신 가입자들에게 서로 다른 파장을 할당해 줘 동시 사용자 수가 늘더라도 대역폭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국내에서는 LG에릭슨 정도만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쏠리테크는 중계기 분야 사업이 점점 축소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성공했다. 이미 일본 통신사업자에서 시제품을 받아갔고, 미국에서도 이 장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중계기 업체 에프알텍은 완전히 색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다. 발광다이오드(LED) 시장이 개화하던 지난 2008년 LED 조명 개발에 착수했다. 이 회사 한쪽에 마련된 제품 전시장에는 각종 간판, 가로등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에는 LED 조명으로 미국 수출용 UL인증을 받은 데 이어 올해 1월과 4월에는 고효율 기자재 인증을 획득했다. 지난해 이 회사 LED 매출액은 14억원이었다. 남재국 사장은 “2년여간 LED 분야에서 노하우를 쌓고 대형 고객에도 공급한 실적이 있다”며 “LED를 회사의 신성장동력으로 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차세대 기지국의 송수신단인 원격무선장비(RRH) 업체 에이스테크놀로지는 스마트자동차 국산화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3년 전부터 차량용 통신 부품에 투자를 집중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차량용 무선고주파집적회로(RFIC) 내장 모듈도 개발하고 있다. 차량IT혁신센터 1·3기에 선정, 기술력도 인정받고 있다.
웨이브일렉트로닉스는 기지국·중계기에 쓰이는 전력 증폭기와 원격무선장비(RRH) 전문 회사다. 통신 장비 시장에서는 삼성전자·히타치 같은 대기업과 협력하고, 자회사 웨이브파워를 통해 새로이 TV 전원공급장치 분야에 진출했다.
◇틈새 시장을 뚫어라=남들이 못하는 것을 하는 기업이 결국 살아남는다. 통신 장비 시장에서도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알에프윈도우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간섭신호제거(ICS) 중계기를 최초로 개발해 국내보다는 일본 시장부터 공략했다. 기술에 더해 해외 시장 조사도 철저하게 했다. 산간 지역이 많고 통신 환경이 열악한 일본의 지방 도시를 중심으로 이 회사 제품이 채택됐다. 통신 장비 설치에 필요한 제도 개선 노력도 이 회사 업무의 일부분이다.
이노와이어리스는 무선통신 시험장비 및 단말기 계측기 전문업체다. 무선통신 테스트 장비 회사는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젠밴드 정도가 유명하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가진 덕분에 국내 휴대폰 제조사 3사를 모두 고객으로 둔건 물론이고 계측기 1위 기업 애질런트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 고에이와 합작법인 ‘아큐버’를 만들어 해외 수출 비중을 국내보다 높였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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