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S 적과의 동침
“PCS 티켓을 잡아라.”
재계에 내려진 지상최대의 명령이었다. 한국통신은 이미 사업권을 받기로 해 느긋했다. 승자의 여유였다.
남은 티켓은 두 장. 통신장비 제조업체군과 통신장비 비(非)제조업체군에서 각 한 장씩의 사업권을 놓고 재계의 합종연횡은 절정에 달했다.
정보통신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중견기업들의 기준을 발표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대한 법률’ 14조 규정에 의한 대규모 기업집단을 대기업으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기본법’ 2조에 따른 업체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들 두 범주에 들지 않은 업체는 중견기업으로 분류했다.
정통부는 또 통신장비 제조업체란 ‘국설교환기와 이동통신시스템 등 주요 통신장비를 제조하는 업체’를 말하고 단말기나 다중화장치, 과금장치, 광케이블 제조업체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PCS 티켓 한 장이 걸린 통신장비제조업체군은 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격전장이었다. 처음에는 LG그룹과 현대와 삼성의 컨소시엄, 대우그룹의 3자 대결구도였다. 하지만 대우그룹이 자체 PCS사업권 도전을 포기해 경쟁구도는 LG그룹과 삼성-현대 컨소시엄의 2파전으로 압축됐다.
당시 PCS사업과 관련해 빅4 중에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은 기업은 LG그룹이다.
삼성과 대우 등이 LG그룹에 제휴를 제안했으나 LG그룹은 이를 거부했다.
삼성그룹으로부터 컨소시엄 구성을 제안받았던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LG텔레콤 사장·부회장,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장 역임, 현 마루홀딩스 회장)의 증언.
“남궁석 삼성데이타시스템 사장(정통부 장관, 16대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작고)이 그런 제안을 해 왔습니다. LG와 삼성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PCS사업이 황금알을 낳은 거위라고 해도 재벌들이 지켜야 할 금지선(禁止線)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장 사장의 계속된 증언.
“우선 도덕적으로 말이 안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벌기업끼리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이 떳떳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재벌기업끼리 제휴해서 돈 되는 사업권을 따겠다고 하면 국민이 이를 용납하겠습니까.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은 재벌공화국이 아니겠습니까.”
정 사장과 남궁 사장은 고려대 동문이었다. 정 사장이 선배고, 남궁 사장이 후배였다. 나이는 남궁 사장이 세 살 위였다. 그것은 남궁 사장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남궁 사장은 처음에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군 제대 후 고려대 경영학과로 편입해서 졸업했다. 그는 1975년에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일하다가 1982년 회사를 그만두고 도미, 미국 일리노이대와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1986년 귀국해 현대전자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러다가 다시 삼성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양 그룹을 대표하는 정보통신 분야 간판이었다. 정 사장은 경영학과를 졸업한 공인회계사로 1978년 금성통신이사를 거쳐 1990년부터 정보통신을 이끌어왔다. 그는 베트남, 루마니아, 중국 등에 전자교환기 수출의 주역이기도 하다. 남 사장은 삼성전자 부사장과 한국PC통신 사장, 한국데이터통신 사장 등을 지냈고 삼성의 정보인프라구축을 앞장서 지휘해왔다.
정 사장의 말.
“남궁 사장이 학교는 후배여도 나이가 위여서 서로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그와 하버드 대학 최고경영자 과정도 같이 다녔습니다.”
대우그룹은 변규칠 그룹회장실 사장(LG상사 회장, LG텔레콤 회장 역임)을 통해 LG그룹에 대연합을 제안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대우 측의 이런 제안에 대해 정장호 사장에게 수용여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정 사장의 회고.
“대우의 제안은 그룹 회장실로 왔어요. 저한테는 직접 그런 제안이 없었어요. 구 회장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며 의견을 묻더군요. 저는 대우그룹의 제안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정 사장은 재벌기업 간의 컨소시엄 구성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성과의 제휴 제안도 그런 이유로 거절했다. 대우는 기술력이 없고 통신사업 경험도 없었다. 대우는 수출로 성장한 기업이었다. 당연히 기업문화가 제조업체인 LG그룹과는 달랐다. 따라서 대우그룹과 대연합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정 사장의 판단이었다.
정 사장의 계속된 설명.
“우리가 무역을 할 것도 아닌데 수출기업과 무슨 컨소시엄이냐며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구 회장이 ‘알았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삼성과 현대의 제휴를 보고 내심 ‘아 이제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가 대기업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겠다는데 랭킹 1위와 2위를 다투는 재벌 간 ‘적과의 동침’을 했다는 게 정책당국이나 국민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LG그룹은 처음 통신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헌조 LG전자 회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에 LG전자와 LG정보통신, LG산전, LG-EDS시스템 등 4개사 관련 인력을 동원했다.
LG그룹은 PCS사업 추진을 위해 6월 말 전 한국통신사업개발단장인 유완영 박사(오리온전기 사장, 한국전파진흥협회 부회장 역임)를 LG전자 전무로 영입했다.
그러다가 구 회장이 LG정보통신 사장인 정 사장에게 PCS사업을 총괄하라고 지시했다.
정 사장은 구 회장을 만나 “PCS 업무 전반에 관한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보기에 따라 괘씸죄에 해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 회장은 정 사장의 말에 두말없이 “그렇게 하라”며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정 사장은 그룹 내에서 100여명의 인력으로 추진팀을 구성했다.
사무실은 서울 방배동에 별도로 마련해 그곳에서 사업계획서 작성 작업을 시작했다.
정 사장은 기술과 자금 등 업무를 총괄할 사람으로 장휘용 인하대 교수(경제학)를 영입했다. 장 교수는 대우출신으로 LG로 자리를 옮겨 회장실 이사로 일하다가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LG 근무 시 정 사장과 LG홈쇼핑사업권을 따기 위해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그의 사업계획서 작성 능력이 뛰어난 점을 정 사장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 사장은 장 교수에게 ‘과거 성공사례도 있고 하니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고 장 교수는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기술 분야는 기술사인 안병욱 LG정보통신 이사(LG텔레콤 부사장, 데이콤 부사장 역임)가 책임을 맡았다.
삼성-현대 컨소시엄도 뒷짐지고 보고만 있지 않았다.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은 4월 2일 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컨소시엄 참여 주주대표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PCS연합컨소시엄 공식 출범식 행사와 함께 주주 계약 조인식을 가졌다.
두 그룹은 출범식에서 신규 PCS서비스를 담당할 회사의 이름을 ‘에버넷’으로 정하고 7월까지 법인설립 및 2000억원 규모의 초기자본금 출연을 매듭짓기로 했다.
에버넷은 양 그룹의 어느 쪽 계열에도 편입되지 않도록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최고경영인의 외부영입, 사외이사제 도입 등을 통해 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에버넷은 대기업 2개사와 중견기업 15개사, 중소기업 130개사 등 총 147개 주주사로 구성했다. LG그룹의 100개보다 절반가량이 많았다. 15개 중견기업은 대한전선, 아남산업, 태일정밀, 대륭정밀, 청호컴퓨터, 한국종합기술금융, 단암산업, 삼립산업, 신일건업, 동아전기, 대성정밀, 한국타이어제조, 청구, 성안, 남성 등이다.
에버넷 자본금은 설립 첫해에 2000억원으로 시작해 1998년까지 총 5000억원으로 확대하고 2002년까지 1조5500억원의 설비투자를 단행, 2002년에 1조3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었다.
이날 행사는 인기 MC 한선교씨(현 한나라당 국회의원)가 사회를 맡고 그룹 ‘코리아나’가 축가를 부르는 등 대외에 세(勢)를 과시했다.
현대와 삼성은 당초 연합컨소시엄 내 대주주 지분율을 각각 20%씩 두 회사의 지분 합계를 40%로 유지키로 했으나 이날 출정식에서 두 회사 지분합계를 33.3% 이내로 줄이기로 했다.
삼성그룹의 남궁 사장은 “기존의 개별컨소시엄에 참여했던 중견·중소기업들이 사별로 70여개에 달했으며 이를 거의 대부분 수용키로 했기 때문에 중견·중소기업들에 더 많은 지분을 할당하기 위해 대주주 지분을 낮추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현대 측 PCS책임자였던 홍성원 박사(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KAIST 서울분원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의 증언.
“삼성과 컨소시엄 구성 후 양팀이 공동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삼성이 사업계획서 작성 등을 주도했습니다.”
‘에버넷’이란 작명을 놓고 삼성-현대 실무자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현대 측 실무자들은 삼성그룹 계열의 용인자연농원이 이름을 용인에버랜드로 바꾼 점을 들어 ‘에버넷’에 삼성의 냄새가 짙다는 불만을 내비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작명소에 의뢰해 30여가지 후보 사명을 작성, 이를 놓고 현대쪽 고위관계자가 최종 낙점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현대전자의 김주용 사장(고려산업개발 사장 역임, 현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은 “애초 용인에버랜드라는 이름이 있었는지 몰랐으며 대승적 차원에서 지엽적인 문제에는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시각에서 굳이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홍 박사의 회고.
“당시 그런 내부 반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대수냐고 해서 문제삼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PCS사업권을 놓고 벌이는 LG그룹과 삼성-현대 간의 한판 승부는 ‘총성 없는 전쟁’ 그 자체였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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