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ECD가 의무교육 종료 시점에 있는 만 15세 학생들의 읽기 · 수학 · 과학 영역의 성취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매 3년마다 실시하는 국제 학업성취도 비교평가(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2006년 조사에서 일본의 수학 성취도는 6위에서 10위로, 과학은 2위에서 6위로 수직 하강했다.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Made in Japan` 전자제품 영향력의 하락세와 비슷한 기간에 이공계 기초학력 저하도 같이 발생했다. 이른바 헤이세이 불황 이후 이러한 이공계 침체와 함께 일본의 전통적인 `장인정신`도 사라지고 있다는 조사가 나오면서 창의적 인재육성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도쿄 중심부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이치카와시의 이치카와고등학교 이과 학생들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면 빠짐없이 집이나 독서실이 아닌 실험실로 향한다. 2학년에 재학 중인 세토구치 레오 군과 나리타 세이토 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1년 전 TV에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얼리면 상식과는 반대로 뜨거운 물이 먼저 얼어붙는다는 내용을 접한 후,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실험에 돌입했다. 두 학생은 “궁금한 것을 스스로 풀어낼 수 있는 공부가 즐겁다”고 말한다.
세토구치와 나리타 두 학생이 실험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일부 학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치카와고등학교가 도입한 `SSH(Super Science High-school)`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공계 기초학력을 높이고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내놓은 특단의 대책 중 하나다.
전국 100개 고등학교에 예산을 지원해 이 · 과학 분야의 기초연구 수준을 늘리고 창의성을 배양하겠다는 의도다. 자민당이 처음 26개 대학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을 집권 민주당은 이를 200개 고등학교로 확대 추진 중이다. 이공계와 창의성 교육의 위기에는 각 정권의 입장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SSH의 기본적인 방식은 학생 스스로 연구 주제를 찾아내고 교사의 조력 아래 연구를 진행해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겁고 딱딱한 과학이 아닌, 생활 속에서 생기는 과학적 호기심이 주제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여 뒤인 4월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해 여름방학인 8월 결과를 발표한다. 우수 성과에 대한 순위를 매겨 학교 간 경쟁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치카와고는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의 이과 학생 400여명이 모두 이 SSH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1937년 설립돼 7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있는 사립고교인 이 학교는 최상의 입시 결과를 배출하는 명문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새로운 변혁의 핵심으로 여기고 투자하고 있다.
마사이치 코가 이치카와학원 이사장은 “학생들에 대해 잘 알고 개개인의 특성을 철저히 찾는다는 학원이념과도 잘 부합한다”며 “SSH 프로그램은 창의적 학습으로 의욕을 높인다”고 말했다.
연구 주제는 다양하다. 아소자키 다츠히로 군(2학년)은 본토의 흙 속에 있는 세균과 화산재에 포함된 세균은 같은 세균이라도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에 돌입했다.
그는 “이 연구를 하면서 토양 세균 분야의 연구자가 될 꿈을 세웠다”고 말했다. 또 `암모니아를 이용하지 않고 거울을 만드는 법`이라는 연구 주제도 눈길을 끈다.
성과도 좋다. 지난 8월 전국 학교들이 모인 SSH 연구발표회에서 18개 연구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특히 이 학교의 학생이 발표한 `불 속에서 전기를 통과시키는 방법`이라는 주제의 연구는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1위는 고베고등학교 학생의 `조류독감에 대한 수학적 분석` 연구가 차지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연구결과를 찾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수동적인 주입식 교육 시보다 이공계에 대한 흥미가 크게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이치카와고등학교 자체 조사결과 SSH 프로그램 도입 후 이공계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이 크게 높아졌다. 이 학교의 전체 60개 SSH 연구그룹 중 3개 그룹을 제외하곤 모두 스스로 계획을 짜냈다. 이와 함께 연구소 견학 등도 흥미를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또 주입식 입시교육과는 반대되는 실습 위주 교육이지만 외려 입시 결과가 좋아졌다. 보고서와 시험으로 학생을 평가했던 종전 방식에 반해 구두 발표 및 포스터 발표로 평가를 시행하면서 학생들의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진 때문이다.
슈지 오이카와 부교장은 “실제로 어떤 내용과 현상을 상상해내지 못하면 문제를 봐도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 현상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고교 교육에 있던 일종의 `벽`을 뚫은 셈”이라고 강조했다.
이 학교의 SSH 프로그램 총감독을 맡고 있는 히데키 오츠카 교사는 “이공계 공부를 하다 의대로 진학하거나 문과로 방향을 돌리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며 “SSH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면 이공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한다는 점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