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 50% 안팎을 점유한 우리나라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산업이 기초 연구 및 표준화 리더십에서는 아직도 변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천기술보다는 응용 및 상용 기술에 치우친 구조적인 요인도 있지만, 기업들이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분야 활동에 소극적인 것도 문제다. 진정한 반도체·디스플레이 강국이 되려면 기업이 전향적인 태도 변화와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세계적인 디스플레이 국제 학술대회인 SID(Society of Information Display)의 논문을 평가하는 ‘프로그램 위원회’에 참여하는 우리나라 회원 수는 미국·일본·유럽 등에 크게 뒤진다. 지난 5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SID 2010’의 경우, 프로그램 위원회에 소속된 우리나라 회원은 25명으로 전체(195명)의 13%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회원들의 논문 비중은 그 두 배에 달하는 26%(182편)로 가장 높았다. 프로그램 위원회는 SID에서 발표되는 논문을 평가하고 배치를 담당하는 SID의 가장 핵심적인 커뮤니티다. 위원회에 미국(91명), 일본(35명), 유럽(27명) 등이 우리나라보다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회원들이 적다보니 보이지 않는 불이익도 당한다. 올해 우리나라 회원의 OLED 관련 중요 논문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그램 위원회 구성은 활동 여부에 따라 매년 조금씩 변하지만 우리나라 회원 비중은 지난 몇 년간 10% 수준에 머물렀다. SID는 디스플레이 관련 기술 현황과 발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학술대회로 매년 8000여명의 학계 및 업계 관계자들이 찾는다. 특히 3D와 플렉시블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와 관련한 표준화까지 논의하는 자리로 그 중요성이 크다.
김용석 홍익대 교수(신소재공학전공)는 “국내 대학 교수 및 국책연구소 연구원 중 SID 회원은 91명으로 일본의 4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며 “디스플레이 연구원들의 규모가 경쟁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삼성전자·LG디스플레이 등 관련 업체의 학회 참여도 꾸준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디스플레이기술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정작 국제 학회 활동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기업 연구개발자들도 할 말이 있다. 한 디스플레이 업체 연구원은 “우리나라 업체는 전문 연구원마저도 과다한 업무, 가욋일로 생각하는 회사 분위기 등으로 2~3회 참석하고 마는 등 영속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기술 모니터링 관련 전문가들을 학회에 10년 이상 꾸준히 참여하며 전문성과 영향력을 키우는 일본업체와 대조적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SID가 창립 이후 40여년간 106명의 우수 연구자에게 수여한 ‘칼 페르디난드 브라운 프라이즈’ 등 6개 부문의 특별 어워드에서 우리나라 회원은 단 한 명도 수상하지 못했다. 일본 과학자는 23명이나 수상했다. 또 학회 회원 중 연구 및 기술적 기여도가 우수한 회원에게 수여되는 펠로도 우리나라는 7명으로 전체(167명)의 4%에 불과하다.
기업의 국제 표준화 활동도 부족하다. 세계 반도체 소자·장비·재료 분야의 민간 표준을 좌지우지하는 세계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표준화 위원 3000여명 가운데 우리나라 위원은 전체의 6%인 180명에 불과하다. 2년 전 4%대보다 많아졌지만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위상과 거리가 멀다. 장비·소자 표준화 작업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반영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SEMI가 만든 규격은 전 세계 반도체·소자, 장비, 재료 기업이 사실상 국제표준으로 인정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김광선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는 “세계 2위와 7위인 소자업체가 있고 세계 장비의 20% 이상이 국내에서 판매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표준화 활동이 국가 위상에 비해 크게 뒤처지는 셈”이라며 “표준이 점점 중요해지는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 기업들도 직원들이 표준화 활동에 적극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형준·양종석기자 hjyo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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