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역전 드라마를 연출하며 ‘약속의 땅’ 더반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태극전사들이 불면을 밤을 보낸 전 국민의 뜨거운 응원 속에 마침내 월드컵 출전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꿈을 이뤄냈다.
본선 무대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선배들의 한을 풀어준 값진 승전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창조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 축구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23일(한국시간) 더반의 모저스 마비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슈퍼이글스’ 나이지리아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B조 조별리그 최종 3차전에서 칼루 우체에게 선제골을 내주고도 이정수의 동골과 박주영의 추가골로 역전에 성공한 뒤 야쿠부 아이예그베니에게 페널티킥 골을 헌납해 2-2로 비겼다.
이로써 1승1무1패(승점 4점)를 기록한 한국은 같은 시각 그리스를 2-0으로 누르고 3전 전승을 올린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올랐다. 그리스는 1승2패, 나이지리아는 1무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까지 7회 연속(총 8회) 본선 무대를 밟았지만 안방에서 개최된 한일 월드컵 때 준결승 진출을 빼면 앞선 여섯 차례 원정 월드컵에선 유럽과 남미의 벽에 막혀 한 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 2-0 완승을 지휘해 월드컵에서 처음 승리를 맛본 한국인 감독이라는 영예를 안은 데 이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까지 일궈내 국내 최고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한국은 오는 26일 오후 11시 포트엘리자베스의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에서 A조 1위 우루과이와 8강 진출을 다툰다.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 때와 같은 멤버의 4-4-2 전형을 썼다. 투톱에는 박주영과 염기훈이 서고 좌우 날개는 박지성과 이청용이 폈다. 오른쪽 풀백으로 차두리가 복귀했고 골문은 변함없이 정성룡이 지켰다.
그리스와 개막전 2-0 승리 때 기분 좋은 기억을 살려 나이지리아를 잡아 16강 진출을 확정하겠다는 허정무 감독의 승부수였다.
1, 2차전 패배로 벼랑 끝에 몰린 나이지리아는 베테랑 느왕쿼 카누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깜짝 배치하고 스트라이커 야쿠부 아이예그베니를 최전방에 세워 한국의 골문을 노렸다.
카누의 경험으로 흐트러진 조직력을 보완하려는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의 계산이었다. 허벅지를 다쳤던 왼쪽 풀백 타예 타이워 자리에는 라비우 아폴라비가 공백을 메웠다. 골문은 빈센트 에니에아마가 지켰다.
6만9천여석의 스탠드를 메운 나이지리아 팬들의 일방적인 부부젤라 응원 속에 붉은악마와 교민들의 대∼한민국 함성이 묻혔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은 강한 투지와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로 초반부터 공세의 수위를 높여갔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상대 미드필드 지역에서 수비수의 공을 가로챈 이청용은 박주영과 1대 2 패스를 주고받고 나서 오른쪽 골지역으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이를 본 박주영이 수비수 뒤쪽으로 돌아들어 간 이청용에게 절묘하게 패스했고 이청용이 뒤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오른발을 갖다댔으나 공은 발에 걸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골키퍼 에니에아마와 충돌한 이청용은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반 8분 기성용의 오른발 중거리 슈팅으로 공격의 포문을 연 한국은 하지만 전반 12분 순간적인 수비 실수로 선제골을 내줬다.
수비형 미드필더 김정우가 빠른 드리블을 하는 치디 오디아에게 오른쪽 측면을 뚫렸고 오디아가 김정우를 뿌리치고 낮게 크로스했다. 왼쪽 페널티지역에 도사리던 칼루 우체가 차두리를 뒤에 두고 오른발로 마무리해 골망을 흔들었다. 위험지역에서 우체를 놓친 차두리의 실책이 뼈아팠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강한 집념으로 나이지리아의 탄력과 빠른 스피드에 맞섰다.
한국은 후반 30분 박지성이 후방에서 길게 올라오자 골지역 왼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고 1대 1로 마주한 골키퍼 에니에아마의 파울로 옐로카드를 유도하며 프리킥을 얻어냈다. 그러나 기성용의 크로스는 무위에 그쳤다.
전반 35분 우체의 강한 중거리슛이 오른쪽 골대를 맞고 튀어나와 추가 실점 위기를 넘긴 한국에 기회가 찾아왔고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가 해결사로 나섰다.
한국은 전반 38분 왼쪽 측면을 빠르게 돌파하던 이영표가 치네두 오바시의 거친 태클로 오른쪽 페널티지역 외곽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키커를 맡은 기성용은 오른발로 감아 찼고 회전이 걸린 공은 수비수 벽을 넘어 오른쪽 골지역에 있던 이정수의 머리를 향했다.
이정수는 지체 없이 달려들며 헤딩을 꽂았고 머리를 맞은 공은 다시 이정수의 오른발에 맞은 뒤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경기 연속 눈부신 선방으로 경기 최우수선수로 뽑혔던 철벽 수문장 에니에아마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이정수의 집념이 돋보인 귀중한 동점골이었다. 이정수는 그리스와 1차전에서 결승 선제골을 사냥한 데 이어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뽑아내 수비수답지 않은 빼어난 골 감각을 뽐냈다.
전반을 1-1 균형을 맞추고 마친 한국이 여세를 몰아 공격의 고삐를 죈 끝에 역전골을 만들어냈다.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은 간판 골잡이 박주영이었다. 박주영은 후반 4분 대니 시투의 파울로 아크 왼쪽에서 프리킥을 얻어냈고 직접 키커로 나섰다. 한 번 숨을 고른 박주영은 오른발로 강하게 감아 찼고 예리하게 휘어진 공은 오른쪽 골네트를 출렁였다. 철벽 골키퍼 에니에아마가 몸을 날려봤지만 공은 골문 모서리에 꽂혔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스위스와 3차전에서 선제골의 빌미가 된 프리킥을 허용했던 박주영은 본선 무대에서 마수걸이 득점포를 가동하며 ‘월드컵 불운’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박주영은 골을 확인하는 순간 무릎을 꿇고 기도 세리머니로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역전골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은 후반 18분 염기훈을 빼고 김남일을 김정우와 더블볼란테의 짝으로 세워 수비를 강화했다. 박주영이 원톱을 맡는 4-2-3-1 전형으로 바꿨다.
나이지리아는 후반 21분 왼쪽에서 땅볼 크로스를 받은 아이예그베니가 골키퍼 정성룡까지 빈 골문 앞에서 살짝 찬 공이 왼쪽 골대를 벗어났다. 한국으로선 실점 위기에서 행운이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고 후반 24분 동점골을 뽑아냈다. 교체 투입된 김남일이 왼쪽 페널티지역에서 마크하던 오바시의 공을 가로채려다 뒷다리를 걷어찬 것. 키커로 나선 아이예그베니는 골키퍼 정성룡을 속이고 왼쪽 골문으로 침착하게 차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다. 김남일의 수비 실수가 부른 통한의 동점골이었다.
나이지리아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후반 34분에는 오바시가 왼쪽 측면을 돌파한 뒤 크로스를 해줬다. 오바페미 마틴스가 골키퍼 정성룡과 1대 1로 마주했지만 로빙슛이 골대를 살짝 벗어났다. 후반 40분 교체 선수인 빅터 오빈나의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도 골대를 살짝 빗겨갔다.
끝까지 버텨낸 태극전사들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는 순간 서로 포옹하며 사상 첫 16강 진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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