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값 강세에 비상걸린 전자업체

"지난주부터 수출 매출채권(달러채권)을 평소 보유량보다 5% 정도 줄이고 있습니다. 제품 인도 후 보통 수출대금을 받기까지 2~3개월 걸리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면 계약부터 대금 수령 때까지 환율 하락으로 손해를 볼 수 있죠. 은행을 통해 달러채권을 조기에 현금화하고 있습니다."(IT 관련 A대기업)

"연초 해외 업체와 화학섬유 원료 30만t 수출 합의를 한 후 정식 계약이 늦어지고 있었는데 이참에 거래를 취소할까도 생각 중입니다. 환율 급락 추세가 이어지면 계약해 봤자 손해를 볼 수밖에 없거든요."(B화섬업체)

국내 기업들이 환율 하락(원화값 상승)으로 시름에 빠졌다. 그동안 환헤지를 비롯해 환율 변동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강화해 왔다지만 올해 초 사업계획을 세울 때 기준으로 삼았던 환율(달러당 1150원 안팎)보다 달러값이 40원가량이나 떨어지자 가격 경쟁력 약화와 달러채권 보유에 따른 손실 등으로 고민하고 있다.

달러당 원화값이 27일 정부의 구두 개입으로 소폭 떨어졌지만 삼성경제연구소 등 주요 분석기관들은 원화값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4분기에는 달러당 1040원대까지 오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 전자ㆍIT업계 수출 경쟁력 약화 고민

국내 A디스플레이 업체는 최근 1000만달러짜리 수주에 성공했지만 별로 기뻐하지 않고 있다. 환율이 떨어진 반면 판매ㆍ관리비가 늘면서 이 프로젝트에서는 적자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지난해 말 프로젝트에서는 30억원 이상 수익이 났는데 똑같은 규모의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남는 게 없을 것 같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전자ㆍIT업계에서는 수출 경쟁력 약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반도체ㆍLCD패널ㆍTVㆍ가전 등 수출 비중이 높은 품목을 다루고 있는 만큼 원화 강세는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기ㆍ전자부품 업종의 고민이 깊다. 확고하게 글로벌 1위인 제품이 없어 해외 경쟁사들과 비슷한 품질의 제품을 놓고 가격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다각도로 원화값 강세에 대한 대응 방안에 나섰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달러화로 지불할 돈과 들어오는 돈을 최대한 맞추는 매칭 작업을 하고 있다"며 "필요한 자재는 현지에서 구매하는 등 구매 합리화와 물류 효율화 등을 통해 외환 리스크 줄이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LG전자의 경우 사업본부별로 2~3명으로 구성된 워룸에서 환율을 실시간으로 점검하며 자사 제품의 경쟁력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 휴대전화와 이동통신의 엇갈린 영향

휴대전화와 이동통신은 환율 급락의 영향이 엇갈린다. 수출을 해야 하는 휴대전화 업체는 가격 경쟁력 약화를 고민하지만 이동통신 업계는 아이폰을 비롯해 외국산 휴대전화를 상대적으로 싸게 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ㆍLG 등 국내 휴대전화 업계는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블랙베리 등에 밀리며 고전하고 있다. 고가 스마트폰 시장의 부진을 중저가 피처폰(일반폰)을 팔아 메우는 구조인데 최근 원화값이 급속히 오르며 이마저도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

원화값이 오르자 국내 이동통신사가 노키아, 애플, HTC 등 외국산폰을 국내에 들여올 때 원가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KT가 아이폰을 대당 500~800달러에 도입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환율 변화에도 아이폰 국내 가격은 정해져 있어 KT는 원화값 상승에 따른 차익을 보전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이폰 하루 판매량이 3000~5000대에 육박하고 있어 달러 대비 원화값이 10원 상승했을 때 KT가 하루에 절약할 수 있는 원가가 1500만~2000만원을 웃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동차도 휴대전화ㆍ이동통신 업계와 비슷하다. 현대ㆍ기아차그룹은 환율 하락이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각도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는 반면 수입차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

◆ 조선ㆍ화섬 등도 긴장

대형 조선업체는 환율 변화의 영향이 크지 않다는 입장이다. 대부분 환헤지를 하고 있고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의 통화 역시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소형 조선업체들은 중국 조선업체들과 건조하는 선종(배 종류)이 겹쳐 가격 경쟁력에서 밀릴 가능성도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고전하던 화섬업계에서는 원화값 상승으로 수출 전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화섬업계 관계자는 "섬유업체 이익은 원ㆍ달러 환율과 직결되는데 최근 환율 하락으로 수출이 늘지만 이익은 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원료를 전량 수입하는 철강업체 입장에서 원화 강세는 기본적으로 원료비를 줄일 수 있어 긍정적이다. 그러나 원ㆍ달러 환율의 지속적인 하락은 장기적으로는 일본이나 중국 철강업체와 비교했을 때 수출 경쟁력 약화로 다가올 수 있다.

◆ 항공업계, 외화 차입 기업 등 `희색`

하이닉스반도체는 원화값 강세가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외화 차입금이 많은 상황에서 원화로 환산한 원금과 이자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올 1분기 말 연결기준으로 하이닉스의 총차입금은 6조6000억원이며 이 가운데 70%가량이 외화 차입금이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현재 환율 추이대로 움직이면 분기마다 1000억원의 차입금 절감 효과가 있다"며 "올해 차입금을 1조원 정도 갚을 예정인데 상당 부분을 외화 차입금으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항공업계에서는 원화가치 상승으로 인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여름휴가철이 낀 3분기 여객 대기 수요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경제 김규식 이승훈 문일호 홍장원 박종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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